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주의하여라 (막 8:14-21)

새벽지기1 2024. 1. 26. 05:00

(2024/01/14, 주현 후 제2주)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그들이 탄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리기를 "우리에게 빵이 없어서 그러시는가 보다" 하였다. 예수께서 이것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없는 것을 두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 너희는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열두 광주리입니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남은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광주리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티없는 접촉


우리에게 새날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삶의 곤고함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도 주님의 희망의 빛이 스며들기를 빕니다. 타락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내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의사 소통을 하지만, 그 말이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나의 말이 다른 이들의 가슴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그저 귓전을 맴돌다 스러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말의 무력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사람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면 뭔가 충만해져야 하는 데 오히려 공허해질 때가 많습니다. 각자의 말만 하다가 헤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우들과 만나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조금씩 알아가고 그간 서로 표현하지 못했던 속깊은 생각들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감사가 바탕이 될 때 대화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줍니다. 하지만 언어가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비꼬기, 냉소, 악담, 거짓말이 횡행합니다. 말을 비수처럼 다루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 언어를 우리는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티없이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참 부족합니다. 다른 이들과 진실되게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진실로 접촉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워라. 이는 자신이 다시 채워지기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위해 당신을 잠잠해지게 하라. 그 사람이 당신의 인생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무엇을 대면할 것인가? 만일 당신 속에서 주를 대면한다면 그는 새로운 평화와 새로운 기쁨을 맛보면서 용기백배하여 돌아갈 것이다. 티없는 접촉은 우리를 하느님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미쉘 꽈스트, <참 삶의 길>, 조철웅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p.132)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 속으로 들어와 날카로운 비수에 찔리지 않고 주님을 대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장자의 제물론(濟物論)에 나오는 말을 저는 종종 떠올립니다. 대지한한(大知閑閑), 소지간간(小知間間), 대언염염(大言炎炎), 소언첨첨(小言詹詹). “커다란 지혜는 아주 한가롭지만, 자그마한 지식은 몹시 바쁘다. 훌륭한 말은 담백하고 맑으나, 하찮은 말은 따지고 헤아린다.”(憨山, <감산의 莊子 풀이>, 오진탁 옮김, 서광사, p.51) 따지고 헤아리는 말을 아주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런 말로 인해 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늘 물어야 합니다.

∎ 경고와 주의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빈 들에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급식 이적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헤쳐 보내신 후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와서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주님은 마음으로 깊이 탄식하시면서 혼잣소리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막 8:12b) 주님은 다시 그들을 떠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호수 이편과 저편으로 옮겨다니는 것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주님이 당신의 사역을 돌아보는 반성과 성찰의 기회였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괴로움은 알지 못한 채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주님이 제자들에게 경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막 8:15b)

‘경고’(diastellō)라는 말이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엄중한 경계의 말이 경고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어조가 비상하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겁니다. 주님은 ‘너희는 주의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注意)는 ‘마음에 새겨 조심함’을 뜻합니다.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익숙한 상황에서는 방심하는 것이 인간의 버릇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내려 미끄러운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은 성큼성큼 걷지 않고 종종걸음 칩니다. 자칫 잘못하면 넘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도 그러합니다. 옛사람들은 한 겨울에 살얼음이 잡힌 내를 건너듯 조심스럽게 살라고 이릅니다(若冬涉川).

‘경고’, ‘주의’, ‘조심’이라는 단어를 연이어 사용하신 것은 이어질 교훈의 엄중함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 예수님이 걸으신 길이 생명임을 믿고 따르려는 이들은 누구나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은 자기들이 빵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꾸짖는 말로 이해하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말은 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듣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말의 어긋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어떤 소리가 귀를 통해 들려오면 인간의 뇌는 그것을 축적된 과거의 지각 경험에 입각해서 그 소리를 이해하거나 판단합니다. 듣는 사람의 관심이 듣는 내용을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빵을 준비하지 못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던 그들은 주님의 입에서 누룩이란 단어가 나오자 즉시 빵을 준비하지 못한 데 대한 책망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의하라 이르셨던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뭘 뜻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누룩은 누군가의 내면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그를 나쁘게 만드는 악덕을 상징합니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는 주님이 경계하신 게 뭔지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난히 자기들의 다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남들과 같지 않음’이 그들의 자부심의 근거였습니다. 여기서 ‘남들’은 대개 유대교가 거룩하지 못한 이들로 규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는 ‘구별하다’는 뜻의 헬라어 ‘pharisaios’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정결 예식, 십일조 규정 등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 때문에 대중적인 존경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기도, 금식, 자선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위선’을 꼽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을 딱히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위선자들의 행동 특색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칭찬을 구합니다. ‘위선자’를 뜻하는 헬라어 hypokritēs는 연기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와 다른 이들을 구별합니다. 자기들의 의로움을 도드라지게 보이기 위해서 비난해야 할 대상을 찾습니다. 비난해야 할 대상이 없으면 만들기도 합니다. 그들은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정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부족합니다. 자기 옳음에 집착하느라 다른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제 것인양 자랑하기도 합니다. 17세기의 프랑스 수도자이자 영성가였던 프랑수아 드 페늘롱은 그런 이들의 특색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선행과 엄격함으로 자기애를 키우며, 자신이 얼마나 고행과 금욕과 의로운 행동, 인내, 겸손, 사심 없음을 실천해 왔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흡족히 여깁니다. 자신이 모든 것에서 영적인 위안을 구한다고 믿지만, 실은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의를 입증하는 데 유리한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이지요. 항상 스스로 잘한 일을 떠올릴 수 있는 상태로 있으려 합니다.”(프랑수아 드 페늘롱, <그리스도인의 완전>, 최애리 옮김, 복있는사람, p.109-110)

그들은 자기 행위에 도취된 사람들입니다. 엄격하게 자기를 통제하고, 선행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자기들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찾는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 23:23)

∎ 헤롯의 누룩


우리가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누룩은 헤롯의 누룩입니다. 헤롯은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를 다스리던 안티파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의미를 좀 확장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헤롯의 누룩은 사람들을 대체가능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서슴없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가차없이 버리는 태도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나뉜 세상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세상의 꿈을 품고 압제의 땅을 떠난 사건이니 말입니다. 땅에서 벌어지는 불의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불평등을 바로잡으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없었다면 출애굽 사건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입니다.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도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정언명령은 상황이 어떠하든 반드시 지켜져야 할 도덕적 명령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음을 믿습니다. 그 말은 아무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 현실은 우리의 이런 믿음을 마구 짓밟는 것처럼 보입니다. 폭력과 테러, 전쟁, 미움과 배척, 혐오가 난무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이미 익숙해졌습니다. 헤롯의 누룩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 내면을 속속들이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결코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동의하기 어려운 이들,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그런 사람들이 활개를 칠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조롱하고 파괴하는 이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이들에게 복종하는 이들입니다. SNS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증오를 퍼뜨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조회수가 늘어나면 수익도 늘어나기에 그들의 언어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입니다. 그런 영상을 보면서 영혼이 맑아지거나 깊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헤롯의 누룩이 우리 삶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뭇 민족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하려 하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 같이 되어야 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눅 22:24-27).

우리는 지금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두루 퍼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조심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세상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룩이 말끔히 제거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바로 그 일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사랑과 우애와 평화입니다. 이 가슴 벅찬 초대에 삶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