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빌 2:12-18)

(2023/12/31, 성탄후 제1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 에벤에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마침내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이르렀습니다. 시간 속을 걸어온 우리의 발자국을 돌아봅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기쁨과 감사의 시간도 있었고, 회의와 환멸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전국의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사자성어가 선정되었습니다. 견리망의(見利忘義), 이익을 보면 의를 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가를 묻기보다는 무엇이 내게 이익인가에 따라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공적 영역에서 더욱 도드라졌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전쟁이라는 가장 큰 낭비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위험 사회의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음에 어둠이 드리울 때가 많았지만 우리는 두 발로 버티어 선 채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상투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고백이 저절로 터져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고안해낸 문장이 아니라, 자기 삶을 치열하게 반성한 끝에 얻어진 문장입니다. 그는 박해와 시련, 오해와 불신 속에서 살았습니다. 속상해 하고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고히 믿었습니다. 솜씨 좋은 장인은 보잘 것 없는 재료를 가지고도 멋진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십니다.

지금 시련의 시간을 어렵게 견디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그 시련을 통해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계신지 기대하십시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십시오. 천사와 씨름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친 야곱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말하는 천사에게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창 32:28)이라는 선언을 이끌어냅니다. 그는 더 이상 남의 뒤꿈치나 잡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사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 귀 기울여 듣다

빌립보서는 감옥에 갇힌 바울이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바울은 그가 겪고 있는 시련을 보고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까 염려합니다. 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서는 우울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어도 그의 영혼의 빛이 흐려지지 않았음을 교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일 겁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들과 함께 있든지 없든지 한결같은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진리를 증언하는 바울의 편지는 교인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편지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이어주는 끈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더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고 당부합니다. ‘순종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후파쿠오hypakouō는 ‘귀를 기울여 듣다’라는 뜻입니다.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의 이미지 하면 늘 떠오르는 것이 박목월 선생님의 시 ‘윤사월’입니다. “송홧가루 날리는/외딴 봉우리//윤사월 해 길다/꾀꼬리 울면//산직이 외딴 집/눈먼 처녀사//문설주에 귀 대이고/엿듣고 있다”. 정경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앞을 보지 못하기에 눈먼 처녀는 오히려 온 몸이 귀가 되어 봄의 소리를 듣습니다. 행여 기척을 느낀 꾀꼬리가 날아갈세라 그는 문설주에 귀를 대고 엿듣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바로 누미노제적 순간이라 믿습니다.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신비한 경험 말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구원을 받기 위해 뭔가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라는 뜻으로 새기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당신의 몸으로 사람들을 갈라놓는 담을 허무신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분열을 넘어 화합과 평화를 지향합니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인들을 배려합니다.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섬기려 합니다. 이런 게 바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자기 부정입니다. 20세기의 탁월한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은 이것을 조금 달리 설명했습니다.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 내가 항상 되고 싶어하는 그것이 되기를 포기해야 하며,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나 자신으로부터 떠나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오지영 옮김, 가톨릭출판사, p.60)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이기적으로 태어났기에 자기의 욕망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분투합니다. 자기의 견해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기를 격리하는 일이고, 타인과의 사이에 벽을 쌓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병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칼 라너는 ‘자신 되기’와 ‘되고 싶어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연결하고, ‘자기를 찾음’과 ‘자신으로부터 떠남’을 대조하고, ‘살고자 하는 욕망’과 ‘죽음’을 마주 세우고 있습니다. 신앙적 역설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법

포기하고, 떠나고, 자기에 대해 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참 자유인의 꿈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병적인 이기주의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이 신비를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 2:13)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곧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는 마음을 심어주십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깊이 일치된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런 마음을 우리 속에 심어주실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을 기쁘게 여기십니다. 교우들 가운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을 행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사자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지만 도움을 받았던 이들을 통해 저는 그런 소식을 접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우리가 이웃들의 고통을 자기 속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필요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심어주신 마음 덕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서로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갈등은 분열과 대립을 낳기 쉽지만 의외로 긍정적인 기능도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함께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창조적 갈등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서 그런 갈등이 발생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빌 2:14). 불평이라는 단어는 ‘구시렁대다(gongysmos)’라고 새길 수 있는 말입니다. 마음에 탐탁하지 않아서 낮은 소리로 자꾸 말을 하는 것 말입니다. ‘시비(dialogismos)’는 애정 없는 비난,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논쟁을 뜻하는 말입니다. 불평과 시비는 한 공동체를 내적으로 허무는 여우가 되기 쉽습니다. 저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고 지냅니다. 어느 분이 장일순 선생을 찾아와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념 대립이 심하다고 염려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모순이 있는 일에 협력해서는 안 되지. 그런데 방법적으로는 아주 부드러워야 할 필요가 있어. 부드러운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만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거든.”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글씨와 그림 장일순, 글 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p.155-156)

어느 외국기자와 나눈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지요.” “그런 혁명도 있습니까?”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앞의 책, p.157) 이런 따뜻함, 이런 넉넉함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 우리가 바로 희망

사도 바울은 우리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 때 성도들은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임이 분명합니다. 제 욕심을 차리느라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염치(廉恥) 없는 이들이 오히려 큰소리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유다서는 이성이 없는 짐승들처럼 본능을 따라 사는 이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요, 길 잃고 떠도는 별들입니다. 짙은 어두움이 그들에게 영원히 마련되어 있습니다.”(유 1:13)

이런 이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추한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거리를 활보합니다.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면서도 자기는 깨끗하다 여깁니다. 사람은 자기 시대를 닮게 마련입니다. “각각의 시대는 심성적으로 자신의 우주를 만든다”고 합니다.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 마음에도 때가 많이 묻었고, 거칠어진 부분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맞아들일 수 있는 여백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렇기에 더욱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홀로는 외롭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동료를 주셨습니다. 믿음의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바울은 순례의 여정에 오른 이들에게 마치 노자를 주듯 말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빌 2:16a)

‘생명의 말씀’은 활자화된 글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활기에 가득 찬 말씀,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함을 보여준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굳게 잡는다’는 말은 거기서 떠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삶이 바로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은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게 된 고난까지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의 소망은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성도들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믿음의 토대 위에 굳게 서서 망가진 세상을 고치고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꿈에 초대받았습니다.

미국의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기원을 추적한 책 <전체주의의 기원>은 시종일관 어둡고 우울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악마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은 역설적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아렌트는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 후에 방점을 찍듯 말합니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우리가 바로 세상의 희망입니다. 이 근원적 확신을 붙들고 새로운 시간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