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곧은 소리 (눅 3:15-17)

새벽지기1 2023. 12. 24. 06:54


(2023/12/10, 대림절 제2주)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 어두운 시절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대림절 두 번째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메시아의 도래를 내다보며 성령에 충만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눅 1:78b-79) 지금도 어둠의 시간을 감내하고 있는 분들, 죽음의 그늘 아래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해가 떠오르기를 빕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무렵의 시대상을 아주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눅 2:1-2). 아우구스티누스의 본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7세의 동맹군에 승리를 거둠으로 10년 이상 지속된 내전을 끝냈습니다. 원로원은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위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여 기원후 14년에 죽을 때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그의 통치 시기부터 스토아 철학자이면서 <명상록>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21-180년)가 다스리던 2세기 말엽에 이르는 200여 년의 기간이 소위 말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 시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호적 등록을 명했습니다. 호적 등록은 일차적으로는 세금 부과를 위한 조치였지만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고 할 때 온 세계는 헬라어로 ‘오이쿠메네oikoumenē’입니다. 오이쿠메네는 바바리안들이 지배하던 땅과 구별되는 장소 곧 로마가 지배하던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호적 등록은 바로 로마 황제의 지배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던 셈입니다.

바로 이런 시대에 우리 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들려온 천사들과 하늘 군대의 찬양은 주님의 탄생의 의미를 넌지시 드러냅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14) 천사가 노래하는 ‘주님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와 대조됩니다. 로마의 평화는 군사력에 근거한 평화이지만, 주님의 평화는 사랑과 섬김과 자기 희생을 통해 이룩하는 평화입니다. 로마는 통치 영역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군대를 보내 초토화시켰습니다. 압도적인 무력에 기초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다스리던 영역 곧 오이쿠메네에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혁명적 선포인 셈입니다.

∎ 광야의 소리


누가는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시작한 때가 디베료 황제(기원후 14년에 황제가 됨)가 왕위에 오른지 열다섯째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던 때라고 말합니다. 다른 분봉왕인 빌립과 루사니아에 대한 이야기도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성경에서 그들은 그리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분봉왕(tetraarcheō/tetrarch)이란 말은 1/4왕이란 뜻입니다. 헤롯 대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아들들이 나라를 넷으로 나눠 통치를 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 아켈라오가 기원후 6년에 폐위되면서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유대지역은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는 총독관구에 속하게 되었고, 다섯 번째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는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 속주를 다스렸습니다.

당시 유대교 성전 체제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였습니다. 그들은 명문 사제 가문으로 특권과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대제사장의 임명권은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순수한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정치가에 가까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힘을 잃지 않기 위해 늘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종교조차 정치화되었으니 갈릴리는 물론이고 유대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내렸습니다. 광야라고 번역된 erēmos는 외딴 곳,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이 머물던 화려한 장소와 대조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임했다는 것은 곧 성전체체에 대한 부정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하나님의 뜻은 주류 교회가 아니라 광야에 서있는 이들을 통해 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말씀이 내렸다고 말한 후에 성경은 즉시 요한이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보도합니다. 광야가 말씀을 받는 침묵의 공간이었다면 요단 강 주변은 요한의 활동 무대가 된 셈입니다. 이런 공간 이동은 매우 심오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요단 강은 출애굽 공동체가 약속의 땅으로 진입하기 위해 꼭 건너야 했던 경계선이었고,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이 귀환할 때 건너야 할 강이었습니다. 요단 강은 그러니까 특정한 장소라기보다는 새로운 질서로의 돌입을 상징합니다. 누가는 세례자 요한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실현하는 인물, 곧 주님 오실 길을 닦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세례는 유대인들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세례를 베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일종의 입문의식이었던 세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에게 세례는 욕망의 터전 위에 인생의 집을 짓던 옛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질서 속으로 뛰어드는 인격의 모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세례는 모두에게 열린 가능성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은 바로 그런 진실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선민이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의 허위의식을 타격합니다.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눅 3:8).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 삶의 방식을 바꾸라


들사람 요한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안일한 일상을 뒤흔들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의 양심을 습격하는 말이었습니다. 선민이라는 자부심, 교인이라는 자만심이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외경심에 사로잡힌 이들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눅 3:10) 오랫동안 관습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던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누군가가 자기 삶을 강력하게 이끌어주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복잡한 신학 이론을 전개하지 않고 아주 심플하게 대답합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눅3:11)

속옷(chitōn)은 맨살 위에 입는 옷입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속옷 두 벌은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탁해서 입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속옷은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에게 최소한의 것이라도 마련해주는 것이야말로 회개한 사람의 삶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 믿음은 헛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러 왔던 세리들도 요한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대답은 역시 간략합니다. “너희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세금 문제는 어느 시대에나 논란거리입니다. 로마의 세금 정책은 더 그러하였습니다. 로마가 한 지역에 세금을 할당하면 그 지역에서 유력한 사람이 세금을 먼저 대납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세금 징수권을 부여받았고 그것을 경매에 붙여 가장 높은 가격을 써낸 사람을 세리장으로 고용했습니다. 세리장은 세리들을 고용하여 세금을 징수하게 했습니다. 하청에 하청을 주는 셈입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들은 백성들을 아주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받지 말라는 말은 부당한 이익에 저항하라는 말입니다.

군인들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의 대답은 역시 명쾌합니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군인들은 무력을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나라가 그들의 손에 쥐어준 칼과 창은 백성들을 협박하거나 거짓 고소하거나 속여도 좋다는 면허장이 아닙니다. 힘을 가진 이들이 자기의 권력욕을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권력에 도취되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때 그는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속속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선포 앞에 설 때마다 김수영 시인의 시 ‘폭포’가 떠오릅니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로 시작되는 시입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유정한 인간은 그것을 그저 무심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살다보면 아득한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어질한 공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의 홀가분한 자유를 부러워합니다. 일종의 외경심입니다. 폭포가 떨어질 때 내는 장쾌한 소리가 가슴을 후련하게 만듭니다. 그는 그 소리를 ‘곧은 소리’라고 일컫습니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 시인은 그 소리가 우리의 나태한 정신을 뒤집어놓는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곧은 소리를 들은 이들은 어쩌면 커다란 폭포 소리를 들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더 큰 분을 가리키는 사람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라는 단어는 기다림이 지나쳐 고통스러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말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으면 학의 목처럼 목이 길어졌겠습니까? 고대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prosdokaō’는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는 ‘pros’와 ‘믿다, 견지하다’라는 뜻의 dokeo가 결합된 말입니다. 고대한다는 말은 마음을 오롯이 하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어려우면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요한도 사람들이 그런 기대를 자기에게 투사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아주 단호하게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며 다른 분을 가리킵니다. 이 단호한 자기 부정이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듭니다.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요한은 오실 그분이 사람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파멸시키는 종말론적 성화의 수단입니다. 동시에 그 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불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눅 12:49)

예수라는 존재 앞에서 세상은 갈라집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주님을 가리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벧전 2:8)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말랑말랑한 캐롤과 아름다운 성탄 장식 그리고 선물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맞이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낡은 생각과 삶의 방식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으로 돌입하기 위한 결단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눅 3:17) 세례자 요한의 이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우리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편견과 미움과 혐오를 청산하지 않고는 주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주님의 빛을 따라 걸으며 우리 또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