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3, 대림절 제1주)
[한 그루 나무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찍혀도 다시 움이 돋아나고, 그 가지가 끊임없이 자라나고, 비록 그 뿌리가 땅 속에서 늙어서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어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한 번 죽으면 사라지게 되어 있고,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물이 말라 버린 강처럼, 바닥이 드러난 호수처럼, 사람도 죽습니다. 죽었다 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늘이 없어지면 없어질까, 죽은 사람이 눈을 뜨지는 못합니다. 차라리 나를 스올에 감추어 두실 수는 없으십니까? 주님의 진노가 가실 때까지만이라도 나를 숨겨 주시고, 기한을 정해 두셨다가 뒷날에 다시 기억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아무리 대장부라 하더라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좋은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고난의 때가 지나가기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시면,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손수 지으신 나를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주님께서 내 모든 걸음걸음을 세고 계시지만, 그 때에는 내 죄를 살피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허물을 자루에 넣어 봉하시고, 내 잘못을 덮어 주실 것입니다.]
∎ 기다림의 절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교회력의 첫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으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수를 전하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혹은 ‘이튿날이 지났다’고 말합니다. 저녁이 앞서 나오고 아침이 뒤를 따릅니다. 우리의 시간 인식과 정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쉼과 성찰의 시간이고 아침은 일을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교회력으로 한 해의 시작을 기다림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대림절은 이 세상에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경축하는 절기이기도 하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어쩌면 삶의 절반은 기다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삶에 결락된 부분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고사목 뿐인 것처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달관한 사람이거나 죽은 사람일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결핍된 것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시간입니다. 학생들은 방학을 기다리고, 군인들은 전역날을 기다리고, 죄수들은 석방되는 날을 기다리고, 갇힌 이들은 구조의 손길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수험생들은 합격 통지를 기다리고, 약혼자들은 결혼식 날을 기다립니다. 열거 하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마라나타! 이 단어는 아람어로 '주님'이란 뜻의 '마르mar'와 '오다'라는 뜻의 '아타ata'가 결합된 것입니다. 어떻게 띄어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마란 아타(maran atha)'라고 하면 '우리 주님이 오신다 혹은 오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마라나 타(marana tha)'라고 하면 청유형으로 '우리 주님, 오소서'라는 뜻이 됩니다(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4, p.514 참조)
아일랜드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가 1952년에 쓴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의 대명사입니다. 황량한 벌판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립니다. 둘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와 왜 만나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가 언제 올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이런 기다림은 불모의 기다림입니다. 아무 것도 산출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잔학함을 경험한 이들의 황폐해진 상황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가 아니지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 같은 처지에 빠진 한 사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 비애에 찬 탄식
그는 욥입니다. 의롭게 살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불행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말입니다. 재산도 잃고, 자녀들도 잃고, 사회적 존경도 잃고,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던 친구들의 말대로 차라리 그가 불의한 일을 저질렀더라면 오히려 시련을 받아들이기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죄를 선뜻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욥은 다그치듯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피하십니까?”(욥 13:23, 24)
욥은 하나님의 처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비해 자기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절감하기에 그는 탄식하듯 말합니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나를 공격하고 계십니다”(욥 13:25). 유한한 인간의 비애가 짙게 느껴집니다. 그의 탄식은 계속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피었다가 시드는 꽃과 같이, 그림자 같이, 사라져서 멈추어 서지를 못합니다”(욥 14:1-2).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누가 불결한 것에서, 정결한 것이 나오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욥14:4). 생각할수록 서럽기만 합니다.
욥은 한 그루 나무를 부러워합니다. 나무는 도끼에 찍혀도 다시 움이 돋아나고, 가지가 자라납니다. 그루터기만 남아도 물기운이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고,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한 번 죽으면 사라지게 마련이고, 그가 세상을 떠나면 있던 자취조차 사라지고 맙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도 욥의 시간을 겪고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범한 행복을 바라지만,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비애에 시달리지 않는 식물들이 차라리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서럽습니다.
1968년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시인 김수영 선생이 떠오릅니다. 그는 전쟁 중에 인민군에 끌려가다가 탈출하여 남하했지만 경찰에 붙잡혀 부산에 있는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2년 남짓한 시간을 보냅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초도 겪었고, 삶의 비참함도 맛보았습니다. 나중에 풀려나 집을 찾아갔지만 아내는 남편이 죽은 줄 알고 남편의 친구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모멸감을 느낍니다. 1954년에 그가 쓴 시에 아주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설움’입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거미’가 대표적입니다. 저도 젊은 시절 뭔가 그리 힘들었는지 이 구절에 사로잡혀 번민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는 자신이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욥의 경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설움에 갇혀버리면 사람은 폐인이 되고 맙니다. 설움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인간의 소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욥은 주님의 진노가 사라질 때까지 차라리 자기를 스올에 감추어 달라고 청합니다. 고난의 때가 지나가기를 그는 간절히 기다립니다.
∎ 우리 시대의 욥들
우리 시대의 욥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난에 몰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 산업 현장에서 불시에 사고를 당한 사람들, 무도한 이들에 의해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사람들, 자연재해든 인재든 불시에 닥쳐온 사건으로 인해 무너진 사람들, 시리아 내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가족도, 살아갈 집도, 희망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게을러서도 무능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그런 여건에 내몰린 것입니다. 그들은 평온하던 일상에서 내쫓긴 사람들, 곧 설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 시대의 욥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균형을 잃어버린 생태계입니다. 수 억 년 동안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우리는 자연의 역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가 정확히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 말이 두렵게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늘 용서하시고, 인간은 가끔 용서하지만, 자연은 반드시 되돌려준다.”
과거에는 욥기를 읽으면 ‘의로운 사람에게 왜 고난이 다가오는가?’ 하는 신정론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광대한 세계 앞에서 우리의 세계관이 얼마나 협소하고 자기 중심적인가를 알려주는 텍스트로 읽기도 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이런 자각에 이르기 어려운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관심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욥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제가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는 믿느냐 안 믿느냐는 척도로 사람을 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합니다. 그가 홀로 만족하는 사람인지 달리 말해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공감하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이 있고,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이 있습니다(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p.93).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사실 이것은 아베 피에르 신부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주님께서 이미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체하고 지나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곁에 다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종교나 인종이나 피부색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태도야말로 주님이 사람을 가르는 척도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죄는 무엇일까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강도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고통받는 사람을 방치함으로써 태만죄(sins of omission)를 저질렀습니다. 인간성에 반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바로 그런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참 사람 예수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주님은 세상의 가장 작은 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당시의 경건하다는 사람들이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해석하는 일에 몰두했다면, 주님은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고스란히 수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눈에서 티끌을 찾아내려 혈안일 때 주님은 그들의 눈물을 먼저 보시고 그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주님은 함부로 판단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짐을 경험한 사람들, 그 가없는 사랑과 만난 이들은 모두 자기 존재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성급하게 정죄하지 않고, 다정한 인내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면 주님이 머무실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무정한 마음, 이기적인 마음, 오만한 마음이 먼저 무너져야 합니다. 이사야는 주님 오실 길을 닦으라며 이렇게 외칩니다.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사 40:4)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계곡에 다리를 놓고, 스스로 높아진 마음을 끌어내려 낮추고, 묵정밭처럼 거칠어진 마음을 살뜰하게 가꾸어 생명이 자라게 만들고,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는 일들이 넘치는 세상을 우애의 공간으로 바꾸려 애쓸 때, 주님은 슬며시 다가와 우리 일을 완수해 주실 것입니다. 따뜻하고 정 깊은 사람들이 몹시도 그리운 시절입니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 주고, 잠시라도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이 막연한 기다림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다리는 세상을 우리가 시작해야 합니다. 아니, 주님이 이미 시작하신 그 일을 우리가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다림입니다. 우리 시대의 욥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벼랑 끝에 선 그들이 발을 내디딜 장소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나는 기다리겠습니다’. 욥의 이 외침이 우렁우렁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손과 발로 삼아 우리 시대 욥들의 곤경을 덜어주고 싶어하십니다. 온 세상의 설움을 다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한 사람의 어려움은 덜어줄 수 있습니다.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한 구절이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나는 헛되이 산 것은 아니리(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I shall not live in vain)”. 교회력의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한 사람에게라도 따뜻한 품이 되어줄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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