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희망의 뿌리(애 3:19-29)

새벽지기1 2023. 12. 25. 05:56


(2023/12/17, 대림절 제3주)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주님께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젊은 시절에 이런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좋고,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겸손하게 사는 것이 좋다.]

∎ 끝나지 않는 전쟁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대림절 세번째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시 88:12) 하고 탄식하는 이들에게 오시는 주님이 그 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설렘으로 기다리지만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엊그제 한 외국신문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을 소개했습니다. 폭격으로 집과 부모를 잃은 한 아이가 병원에 실려왔습니다. 보호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의사들은 그 아이의 몸에 ‘unknown trauma child’라고 적어두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한 이름을 가지고 사랑을 받던 아이의 이름이 소거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일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 아기는 더 이상 누군가의 따뜻한 돌봄을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자 지구에서 전투가 길어지면서 주민들은 이주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남부로 떠났지만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집을 지키려는 이들도 많습니다. 영구 이주민이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래도 죽을 거고 저래도 죽을 거면 집에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마음 아파하는 것은 전쟁 초기에 국제 사회가 보여주었던 관심이 숙어들면서 자기들의 고통이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서안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를 점령한 1967년 이후 최소 250만 그루의 올리브나무가 불태워지고, 목 잘리고, 뿌리 뽑혀 나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베어진 나무와 자기들의 운명을 동일시합니다. 그 현장을 다녀온 박노해 시인의 말이 가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에는 나무를 찾아보기 어렵다. 나무를 심을 땅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의해 뿌리 뽑힌 고향 땅의 올리브나무를 포스터에 담아 거리마다 붙여둔 난민들. 이 나무들처럼 뿌리 뽑혀 떠돌고 있는 난민들은 언젠가 자유의 대지에 심은 올리브나무 아래서 푸른 잎을 날리며 살아갈 그날만을 꿈꾼다.”(박노해 사진 에세이 06, <올리브나무 아래>, 느린걸음, p.72)

저는 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유심히 보면서 렘브란트가 그린 ‘애굽으로 이주’라는 그림을 찾아보았습니다. 이 그림은 1627년에 그려졌습니다. 이 무렵 유럽은 가톨릭과 개신교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의 참상에 시달리던 때입니다. 렘브란트가 그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속에서 성 가족들은 헤롯의 칼날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있는 마리아는 담요로 자기와 아기를 두루고 있습니다. 그 눈빛에 담긴 불안이 매우 깊습니다. 요셉의 행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맨발로 걷는 그의 모습은 그의 가난과 위태로운 처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어깨에 걸머진 가방도 가볍기만 합니다.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왼손으로 나귀의 고삐를 쥐고,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지만 그는 자기 미래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빛이 그들 가족을 비치고 있지만, 주변은 온통 어둠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나귀조차도 우울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17세기 유럽인들의 정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애가


유사 이래 전쟁이 없던 시기는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다 가인의 후예들이기 때문일까요? 예레미야 애가는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무너진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책입니다. 예레미야가 저자라는 사람도 있고, 예레미야의 심정이 담긴 책이기에 그의 것으로 소개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DNA 속에 심겨진 가장 어두운 기억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던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나던 시드기야 왕은 붙잡혀 바벨론 왕에게 끌려가 무릎을 꿇리는 굴욕을 당합니다. 그는 아들들이 자기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 자신은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굶주림과 학살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맨발로 끌려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일부가 그 땅에 남았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폐허로 변한 땅과 흉흉한 인심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가옥들은 불태워졌고, 성전도 유린된 채 무너졌고, 성벽조차 허물어졌습니다. 모든 희망이 다 스러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가문과 맺었던 언약이 파기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을 길 없었고, 희망의 불빛은 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것은 비통한 부르짖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애가는 다섯 개의 비통한 노래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1장 2장 그리고 4장은 ‘아 슬프다’라는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êḵ라는 단어를 옮긴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아니 어떻게’라는 뜻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말문이 턱 막힌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고통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무능하신 것일까?’ ‘하나님이 무심하신 것일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일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과녁으로 삼아 활을 당기시고,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까지 채워주시는 것 같습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못 들으신 척 하실 뿐입니다. 평안은 사라지고, 행복은 잊혀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을 돌아보며 탄식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고, 자기 욕망을 채우느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이 닥치기까지는 멈추지 못하는 게 인간의 병통입니다. 죄의 습성이 몸에 밴 사람들은 좀처럼 멈추거나 돌이키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겪고 있는 참상은 죄에 대한 엄중한 징계였습니다. 그렇기에 탄식하듯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죄를 짓더니, 마침내 조롱거리가 되었구나.”(애 1:8a) “그의 더러움이 치마 속에 있으나, 자기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는다.”(애 1: 9a) 이 대목을 가톨릭 성경은 더 생생하게 번역해놓았습니다. “부정이 옷자락에 묻어 있어도 제 종말을 생각하지 않더니”. 상황을 인식하고 나니 더욱 암담합니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애 3:19-20)

∎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희망은 영영 없는 것일까요? 희망이 없다면 그대로 주저앉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희망을 버리고 세상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세상을 등지는 이들 소식을 간간이 듣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을까요? 누구도 그들에게 돌을 던지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품어주지 못한 우리의 무정함을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눅 10:36)고 물으셨습니다. 윤리의 핵심은 ‘이웃 되어주기’라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 외곽에 있는 ‘아르메니아 학살 기념관‘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국제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살 당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에서 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거듭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광장을 돌아나오다가 매우 인상적인 동상 하나와 만났습니다. ‘ 잿더미 속에서 일어서는 엄마’라는 제목의 이 동상의 아랫단에는 “1915년의 학살에서 죽어간 이들과 생존자들 그리고 탈출한 이들을 기억하고, 기독교 신앙과 그 전통 위에 굳게 서있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자행된 잔혹행위를 잊지 않기 위해 이 동상을 세운다”는 헌사가 붙어 있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아이를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가 부둥켜 안고 있습니다. 맨발의 그 엄마는 겁에 질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었습니다. 잿더미 같은 절망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엄마를 일으켜 세운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아이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아이를 살려야 했기에 엄마는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책임과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주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한 가나안 여인이 주님께 나아와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는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상하게도 그 여인의 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처지를 딱하게 여긴 제자들이 주님께 여인을 안심시켜서 보내는 게 어떠냐고 여쭙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냉혹하기만 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먼 발치에서 들려오는 그 말을 들었을 텐데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직접 주님께 나아와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차갑기만 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딸이 온전한 삶을 얻을 수 있다면 어머니는 어떤 모욕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마 15:21-28). 모욕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는 단절되는 법입니다. 여인은 모욕적인 말을 그냥 가슴으로 품어버렸습니다. 어머니의 이 가없는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 여인을 만나기 직전까지 주님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여인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한 개인의 문제가 사소하지 않다는 사실을 주님께 다시금 일깨워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 신실하신 주


희망은 사랑 속에서 배어나옵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희망의 뿌리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애가의 저자는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희망의 서광을 발견합니다. 고통 때문에, 흐르는 눈물 때문에, 터져나오는 탄식 때문에 잊고 있었던 것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자기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애가의 저자는 문득 알아차립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ḥeseḏ)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raḥam)이 끝이 없다는 사실이 희망의 뿌리였습니다. 애가가 돌연 신뢰의 노래로 돌변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애 3:23)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애 3:24)

많은 이들이 이 구절에 밑줄을 긋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고통과 시련의 불을 통과한 후에 얻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라 하여 고통을 겪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은 사람을 무너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단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롬 5:3-4)고 말했습니다. 고통을 통해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는 이 구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세상의 모든 모순과 슬픔을 짊어지신 주님이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임마누엘’,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희망의 뿌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기시고 영광의 아름다움을 입혀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 옷은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눈물로 짠 것입니다. 지금 깊은 어둠 속을 걷는 분들이 계십니까? 조바심하지 마십시오. 애가의 저자는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애 3:26)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맥없이 손을 놓고 기다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사람이 거두는 법입니다. 우리는 세상 도처에 사랑과 평화의 씨를 뿌리라고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는 선한 가능성을 깨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짊어진 멍에가 무거워도 원망할 사람을 찾지 마십시오. 투덜거린다고 하여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무능할 수 없었던 어머니처럼 이 거친 세상에서도 생명이 자랄 수 있음을 신뢰하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리라 믿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모실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우리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아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