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미 6:6-8)

새벽지기1 2024. 1. 20. 06:25


(2024/01/07, 주현 후 제1주)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어려운 시절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새해 첫 주일 아침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연초부터 참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의 피해가 막대하고, 하네다 공항에서는 항공기에 불이 나서 큰 피해가 났습니다. 이란에서는 솔레이마니 혁명 수비대 사령관의 4주기 추모식 현장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으로 3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격앙된 이란은 보복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인근에 무장 드론을 보내 시설물을 폭격했습니다. 새로운 중동 전쟁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번져가고 있습니다. 예멘의 후티 반군은 홍해를 지나는 선박을 공격했습니다. 국제유가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북유럽은 상상하기 어려운 한파에 시달리고, 영국에서는 때 아닌 홍수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인에 대한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증오와 적대감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세상입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설렘으로 맞이한 새해의 실상입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근본을 성찰해야 합니다.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미가 선지자에게 길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의 시대는 앗시리아가 자기 확장을 위해 주변세계를 거침없이 파괴하던 전쟁의 시기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앗시리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산헤립 왕은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쳤습니다. 요새화된 성읍 46개가 파괴되었습니다. 미가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5km 쯤 떨어진 평야지대에 있던 도성 모레셋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의 상류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누가 하나님과 같으신가?’라는 뜻을 담고 있는 미가라는 이름 자체가 메시지인 셈입니다. 미가는 산헤립의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결국 예루살렘 파괴의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것은 국제 정세에 대한 정밀한 분석 가운데 나온 예측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 시대를 통찰한 결과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정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했습니다.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고 산 채로 잡아 먹었습니다. 관료나 재판관들은 뇌물을 좋아하고,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도 삯을 받고야 주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 통속이 되어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미 3:11c) 분노한 미가는 지도자들의 도덕적, 신앙적 파탄을 섬뜩할 정도의 언어로 꾸짖습니다.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망한다! 그들은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이다.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미 2:1-2)

일찍이 출애굽 공동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구별되지 않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런 세상은 힘 있는 자들이 특권을 내려놓고,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의 형편을 돌볼 마음을 낼 때 가능합니다. 해방의 감격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을 때는 가능했습니다. 기쁨과 감사는 욕망에 대한 해독제입니다.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면 사람들의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자기 중심주의가 고개를 들게 마련입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꿈은 가뭇없이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미 6:6a)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 마주치는 현장입니다.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인 40장에서 우리는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출40:34-35)는 구절과 만납니다.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 1장 1절은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너희는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출 23:15, 신 16:16-17 참고)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면 될까요?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바치면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맏아들을 바치면 허물을 벗겨주실까요? 이런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것을 요구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빈 손으로 오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이 있는지를 잘 살피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이렇게도 어리석습니다. 미가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향해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너 사람아’는 ‘에구, 이 인간아!’라는 말로 들립니다. 실제로 ‘사람’이라 번역된 이 단어는 ‘아담āḏām’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것을 mortal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유한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까? 갈림길에 설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여쭙곤 합니다. 정말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매번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방향만 가리켜 보이십니다. 그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 해를 끼치지 말라


미가는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아주 간명하게 보여줍니다. ‘공의를 실천하는 것’, ‘인자를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쉽지요? 노자도 도덕경 67장에서 자기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면서 그것을 잘 지키고 간직하려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자애로움이고 둘째는 검약함이고 셋째는 세상 앞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노자는 자애로우면 용감할 수 있고, 검약하면 풍족하게 되고, 앞으로 나서지 않음으로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을 지키기 위해 주저없이 위험에 뛰어듭니다. 자애로우면 용감하다는 말이 뜻하는 바입니다. 성숙한 사람의 특색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도 감리교인들이 늘 명심해야 할 세 가지 삶의 원리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해를 끼치지 말라’, ‘선을 행하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 그런데 잘 살펴보면 웨슬리가 제시하는 삶의 원리는 미가서가 전하는 메시지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를 끼치지 말라’는 말을 뒤집어 보면 ‘공의를 실천하라’는 말이 됩니다. 해를 끼치지 말라는 말은 소극적인 윤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재산상의 손실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해도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나의 말과 태도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모욕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죄가 중력처럼 우리를 아래로 잡아당길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분열적인 태도를 취하고, 사람들을 얕잡아 봅니다. 우리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살 때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오히려 줄어듭니다.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우리 사이에 모셔야 합니다.

∎ 선을 행하라


‘선을 행하라’는 말과 ‘인자를 사랑하라’는 말도 서로 통합니다. 인자한 이들은 사납지 않습니다. 저는 사나운 세태에 지칠 때마다 김준태 시인의 ‘인간은 거룩하다’를 떠올립니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한 그릇의 물일랑도 엎지르지 말라/물 속에는 사람의 하늘이 출렁이나니/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그대여/한 삽의 흙일랑도 불구덩이에 던지지 말라”. 시인은 땅 위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다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고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분열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물론 쉽지 않습니다. 존중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고,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람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타자의 태도나 말에 따라 우리의 행동 방향을 정한다면 우리는 ‘인자를 사랑하라’는 말을 오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름에 대한 응답이어야 합니다. 수없이 많은 악의에 시달렸으면서도 바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롬 12:9-10)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서로 다정하게 대하십시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이것이 성화의 길을 걷는 우리가 가슴에 새기고 또 굳게 붙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 ‘사람들 앞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과 다 통합니다. 동행자가 누구냐에 따라 우리 태도가 달라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가면을 바꿔 쓰며 삽니다. 어떤 때는 거침없이 행동하기도 하지만 사뭇 조심스럽게 처신할 때도 있습니다. 운전하는 분들도 동승자가 누구냐에 따라 차를 조심스럽게 몰기도 하고 거칠게 몰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와 삶의 여정을 함께 하고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의 고백은 우리가 필요할 때만 떠올리는 말이 된 것은 아닌지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이들은 경거망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골 2:6-7)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을 바울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뿌리를 박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면 우리 또한 주님이 맺으신 삶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의 열매 말입니다. 올해도 여전히 세상은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둠에 삼켜지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 걸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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