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넘치는 사랑 (느 9:27-31)

새벽지기1 2024. 1. 30. 06:41

(2024/01/21, 주현 후 제3주)

[주님께서는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내맡기시어 억압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억눌림을 받고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을 끔찍이도 불쌍히 여기시어, 원수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건져낼 구원자들을 보내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살만하면, 주님께서 보고 계시는데도, 또다시 못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럴 때에는, 주님께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버려 두셔서, 억눌림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돌이켜 주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구하여 주시곤 하셨습니다. 돌이켜 주님의 율법대로 바로 살라고, 주님께서 엄하게 타이르셨지만, 그들은 거만하여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키기만 하면 살게 되는 법을 주셨지만, 오히려 그 법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께 등을 돌리고, 목이 뻣뻣하여 고집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러 해 동안 참으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주님의 영으로 타이르셨지만, 사람들은 귀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주님께서는 그들을 여러 나라 백성에게 넘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을 끔찍이도 불쌍히 여기셔서, 멸망시키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 하나님과의 생생한 접촉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계절은 이제 소한을 지나 대한에 이르렀습니다. 대한 다음이 입춘이니 이제 겨울도 끝자락이 보입니다. 맑은 하늘을 보고 싶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햇빛보다 해맑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어렵고 우울한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려움이 많아도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기적들 사이를 앞 못보는 사람들처럼 스쳐 지나가곤 합니다. 주변을 살필 여유 혹은 여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지옥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서로를 떠날 수도 없으며 그들로부터 떠날 수 없는 곳”(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오지영 옮김, 가톨릭출판사, p.131)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늘 지옥도를 보며 삽니다. 서로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서로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주와 미움과 비꼬는 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 마음의 온기가 사라집니다. 그 어느 때보다 믿음이 더 소중한 시대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생생한 접촉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제 아무리 진창 같을지라도 역사를 정의의 방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세상의 어떤 어둠도 무력화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빛을 신뢰하는 이들은 명랑함을 잃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는 인간들과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엇갈린 사랑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짝사랑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국으로 귀환한 후에 벌어진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총독의 지휘하에 백성들은 악조건 속에서도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았고, 문들을 제자리에 다 달았습니다. 사람들은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다른 손에는 연장을 들고 일해야 했습니다. 주변 부족들의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성벽을 다 쌓은 후 지도자들은 나라의 틀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백성들을 가족별로 등록시켰습니다. 인구는 적었고, 제대로 지은 집도 별로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중심이 필요했습니다. 불안한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비끌어맬 수 있는 중심 말입니다. 그 중심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율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학자 에스라에게 율법을 가져와 낭독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든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펼치면 백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배치되어 있던 레위인들이 백성들에게 그 율법의 뜻을 풀어 설명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인 자기들의 모습을 보고 울었습니다. 욕망의 벌판을 헤매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온 자기들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명한 대로 초막절기를 지켰습니다. 초막절은 탈출 공동체가 광야에서 살던 모습을 떠올리며 자기들의 삶의 근본을 돌아보는 절기입니다. 백성들은 다 모여서 금식하면서 굵은 베옷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허물과 조상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 살찐 마음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 주님을 찬양하는 한편 죄를 자백하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 기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원사의 틀 속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주님만이 홀로 우리의 주님이라는 대전제에서 출발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 홍해 바다에서 일어난 일, 시내산 언약, 만나, 금송아지 사건….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염증을 느끼셨지만 그들을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목말라 할 때는 물을 주셨고, 선한 영을 주셔서 슬기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게 되면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먹고 만족하게 생각했으며, 살이 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큰 복을 한껏 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 반역하였으며, 주님께서 주신 율법을 등졌습니다. 주님께로 돌아가라고 타이르던 예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듯 엄청나게 주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느 9:25c-26)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넘겨 억압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억눌림에 지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끔찍이도 불쌍하게 여기서, 구원자를 보내어 억압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살만하면, 또다시 못된 일을 저질렀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버릇입니다. 모세는 일찍이 출애굽 공동체에게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신 8:12-14)

풍요로운 생활은 교만한 마음으로 이어지고,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으로 귀착됩니다. 모세는 ‘혹시라도’라는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런 일은 언제나 발생하는 법입니다. 하나님 잊음의 시작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자기 옳음을 지나치게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임기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청한 것은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새번역은 ‘지혜로운 마음’으로 옮겼지만 히브리어 샤매(šāmaʿ)는 기본적으로 ‘귀 기울여 듣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는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숨겨진 마음의 소리까지 듣는 것이 왕의 직무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던 삭개오를 보고, 그를 부르시고, 기꺼이 그 집의 손님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이라 규정된 이들의 숨겨진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거기에 응답하셨습니다. 들음이 지혜라면 듣지 않음은 어리석음의 징표입니다.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자기를 실제보다 높이 평가하여 스스로의 오류를 알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늘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우리가 흔히 쉐마라고 일컫는 신명기 6장 4절부터 9절은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쉐마는 앞에서 말한 샤매의 2인칭 명령형입니다. 듣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지만 마음에 살이 찐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남문 밖에 있는 바울의 참수 기념 교회인 트레 폰타네 수도원 경내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은 입술에 검지를 올리고 서서 침묵할 것을 요구하는 베네딕드 성인의 동상입니다. 들음이 신앙의 출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언자들을 보내 백성들을 타일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느 9:30).

∎ 과분한 사랑


그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여러 나라에 넘겨주심으로 징계하셨지만 끝내 그들을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을 끔찍이도 불쌍히 여기셔서, 멸망시키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느 9:31)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하면 떠오르는 것이 자비 혹은 긍휼이라고 번역되는 라햄(raḥam)입니다. 이 단어는 ‘자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자기 태중에 들어온 생명을 아끼고 귀히 여기고 그 생명을 위해 자기를 위험 속에 던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엄마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닮았음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다른 단어는 인자하심으로 번역되는 헤세드(ḥeseḏ)입니다. 이 단어는 늘 하나님과 그 백성이 맺은 언약의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헤세드는 ‘넘치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언약의 다른 쪽 파트너가 충실하지 못할 때도 유지되는 사랑입니다. 헤세드는 상황이 변해도 철회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받는 사람의 자격과 상관없이 주시는 분의 선의에 따라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면 부모들은 아파하고 속상해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를 아예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랑을 신뢰할 수 있을 때 자식들은 언젠가는 그 사랑에 의지하여 어긋난 길에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주의 기초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내가 말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굳게 서 있을 것이요, 주님께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하늘에 견고하게 세워 두실 것입니다.’”(시 89:2)

백성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그들이 많은 시련과 환난을 당한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의 죄 때문임을 새삼 상기시킵니다. 주님께서 타이르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큰 복을 누리면서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은 결과가 바로 이방 민족에게 종살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을 돌이켜 본 후에 주님과 다시 언약을 세웠습니다. 일종의 언약 갱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언약의 갱신입니다.

삶이 곤고하고, 세상은 어둡습니다. 도처에서 전쟁의 소문이 들려옵니다. 바로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우리 마음에 살이 찌지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평안함이 하나님 망각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자기를 자꾸 돌아보고 근본을 사고하는 이들이 늘어나야 세상의 혼돈이 줄어듭니다. 가끔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모두가 달려가는 길에서 조금쯤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이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더구나 넘치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평화의 씨를 뿌려 정의의 열매를 거두고(약 3:18), 정의를 뿌려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호 10:12) 일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후에 주님의 손과 발로 살아가는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