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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 가운데에도 섭리하신 하나님(삼상22:1-5) / 리민수목사

방황 가운데에도 섭리하신 하나님(삼상22:1-5) 앞서 블렛세 땅 가드에서 절박한 위기를 당한 다윗은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채 아둘람 굴로 도망친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접한 다윗의 온 가족과 사울 통치하에서 억압받던 자들이 다윗 주위에 몰려들었다(1-2절).  이에 다윗은 그의 추종자들(약400인)을 이끌고 유다에 이르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린다. 이렇듯 다윗은 이방 땅에서 피난처를 찾지 못했지만 그 방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장차 다윗 왕국의 인재들을 얻게 된 것이다.

헤어질 준비, 6월5일, 화 / 정용섭목사

주님, 우리는 만나는 기쁨보다는 헤어지는 슬픔이 더 큰 세상을 삽니다. 만남의 시간은 극히 짧고 헤어짐의 시간은 무한히 깁니다. 그러니 어찌 만남의 기쁨에 도취되어서 헤어짐의 슬픔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이 세상에서 저는 곧 떠나야 합니다.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곧 떠나야 합니다. 세상과 헤어져야만 합니다. 예외 없이 모든 것들과 헤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떠남과 헤어짐의 훈련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저로 하여금 미리 헤어질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게 도와주십시오. 헤어질 순간이 오기 전의 모든 삶을 그런 준비로 채우기 원합니다. 그런 준비가 없다면 결국 헤어져야 할 순간에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헤어져야 하기에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

삶과 허무, 6월4일, 월 / 정용섭목사

주님, 우리는 지금 당신께서 선물로 주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삶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당장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삶이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금 사람들이 무언가를 성취하면서 열정적으로 살고 있지만, 반대로 수많은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죽어나갑니다. 늙어서 죽기도 하지만 젊어서도 죽습니다. 병들어 죽기도 하고, 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이유를 모르는 죽음도 많습니다. 도대체 삶은 무엇입니까?     주님,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아예 생각을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또는 자기 연민에 발을 걸치고 삽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시간이..

삼위일체 하나님, 6월3일, 주일 / 정용섭목사

주님, 교회는 성령강림절후 첫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로 지킵니다. 성령강림 사건을 기점으로 이제 교회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믿게 되었으니, 삼위일체 주일을 지키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당신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아들이시며, 성령이십니다. 아버지는 창조주이시고, 아들은 구세주이시며, 성령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하시면서 세계를 다스리시고, 아들 하나님은 역사에 내재하시면서 세계를 구원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영으로서 현재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인식하고 믿을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성령이 생명의 ..

희망에 대해, 6월2일, 토 / 정용섭목사

주님, 이 땅에서 곧 죽을 운명에 처해진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희망이라는 말이 가능합니까? 피조물인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해도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흔적이 남았다 해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마당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주님, 헬라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에 하나 남은 것이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그 희망이 있기에 인간이 수많은 불행 가운데서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실상은 정반대인지도 모릅니다.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해서 판도라가 연 상자에서 쏟아진 수많은 불행과 재앙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게 희망이라면 희망도 역시 그런 류에 속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6월1일, 금 / 정용섭목사

주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요한 장로의 진술(요일 4:16)은 놀랍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서로 좋아하는 마음과 그런 태도, 서로 아끼고 참아주는 마음과 그런 태도입니까? 그런 것으로 사랑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어떤 고상한 말로도 하나님을 온전하게 해명할 수 없듯이 사랑도 해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듯이 사랑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의 능력이십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거듭해서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사랑을 사람에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사랑을 자기 스스로 실천해보..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30:14) / 이금환목사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30:14)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누리게 될 복과 은혜를 말씀하실 때 듣는 자들은 핑계를 대고, 지키지 못할 변명들을 늘어놓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신30:11)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어놓은 변명, 청종할 수 없는 이유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신30:12),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신30:13)는 ..

새 예루살렘 (이사야서 54장) / 김영봉목사

해설:1절부터 10절은 유다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한 너”(1절)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상징이다. 바빌로니아에게 멸망 당한 후, 유다와 예루살렘은 자녀가 없는 여인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중상류층 유대인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가고 하층민만 남겨졌기 때문이다. “많은 자녀를 볼 것이다”라는 말은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그 때가 되면 유다는 이방 나라까지 세력을 뻗칠 것이다(2-3절). 유다 백성은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다시는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4절). “온 세상의 하나님”이 유다 백성의 남편이 되어 줄 것이다(5절).  유다는 마치 젊은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인과 같다. 아내의 간음(유다의 우상 숭배)으로..

이스라엘 왕이 정녕 망하리로다.(호 10:1-15) / 신동식목사

권력이 영원할 같지만 망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자기 책임을 다 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권력을 다시 회수합니다.여로보암2세 시대의 화려함과 부강함과 강력함은 자랑이고 교만이었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습니다.선지자가 술 취함에서 깨어나라고 하였지만 여전히 취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분명하였습니다. 바로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들의 우상은 맘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망하는 나라와 권력의 특징입니다.헛된 말과 거짓 맹세의 언약을 하나님 앞에 버젓이 합니다. 망하는 자들은 항상 거짓을 행합니다. 누구든지 거짓을 즐겨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죄죽임을 하지 않고 기브아시대로부터 반복하여 우상을 섬겼습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호 11:1-11)

호 11:1-11 묵상입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변함도 없고 다함도 없는 언약적 사랑입니다.그러나 그 언약 백성은 그 사랑을 거부합니다. 우상을 섬기며 열강을 의지하는 언약 백성.우상의 노예가 되며 열강의 포로가 됩니다.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통해 심판하십니다. 심판 중에도 긍휼과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언약에 신실하시고 회복의 은총을 베푸십니다.‘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그러나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은 함량미달입니다.긍휼을 구하며 믿음의 허리띠를 고쳐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