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4,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 부르신 까닭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다 하여 붙여진 명칭입니다. 중첩된 어둠과 시대적 우울을 깨뜨릴 분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세상의 단초를 보았습니다. 그분이야말로 다윗 왕국의 영화로움을 회복할 분이라는 기대와 설렘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흥분한 그 상황에서 주님 홀로 고요하셨습니다. 과도한 열정이 얼마나 쓰디쓴 결말을 맺는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군중들의 환호성에 마음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환호성 이면에서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는 박해의 그림자를 주님 홀로 꿰뚫어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들의 이익을 침해하려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미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갖은 명분을 다 찾아내지만 가장 깊은 동기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익의 문제에 담백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입성과 이어진 십자가 처형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과 세상에 깊숙히 도사린 악의 실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고통 앞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자부하는 이들조차 십자가의 길은 한사코 외면하려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은 쾌적하고 한가로운 오솔길일 때도 있지만, 우리 발걸음을 지체하게 만드는 너덜길이거나 위험이 도사린 길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좁아서 사람들이 잘 가려 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 좁은 길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이야말로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영생을 구하면서도 그 길을 회피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대로 ‘진리를 피하면서 찾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십자가는 마다하면서도 영광은 누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인격의 모험이 없는 믿음은 허위의식이 되기 쉽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라는 책을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숙적(宿敵)이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값싼 은혜란 투매(投賣)상품인 은혜,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29)
자기 삶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결단이 없이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십자가를 경배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걸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라는 말을 오용되고 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반성조차 없이 은혜를 기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 진통 사회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현대사회를 ‘진통(鎭痛)사회’라고 칭합니다(한병철, <고통없는 사회>, 이재영 옮김, 김영사, p. 13).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해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그런 ‘진통(陣痛)’ 말고, 아픔을 진정시킨다는 의미의 진통 말입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현대인들은 유난히 고통에 예민합니다. 고통은 숨기거나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소한 일에도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한병철 교수는 진통사회는 ‘좋아요’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SNS에 자기의 근황을 올리고 다른 이들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행복하고 적으면 소외감을 느낍니다. 타인들의 인정이 나의 감정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며 살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애씁니다.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이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는 요소는 가급적이면 말끔하게 제거해야 ‘좋아요’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거꾸로 불필요할 정도로 편가르기를 하거나 혐오 발언을 할 때 ‘좋아요’를 많이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SNS 공간은 과도한 긍정성과 부정성이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담담하고 담백한 삶은 외면당합니다.
그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정작 얻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외로움과 고립이 심화되기도 합니다. 긍정성 과잉의 사회, 곧 고통을 말끔하게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는 무정한 사회가 됩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의 존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우리 삶의 평안을 깨뜨립니다. 그렇기에 이런 이들과 가급적 대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의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고,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것은 자기의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한 생각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삶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흐르는 모래에 갇힌 듯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들려주신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기억하시지요? 주인은 가장 나중에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에게 제일 먼저 품삯을 지불했습니다. 그들의 노동에 비례해서 지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셈법입니다.
∎ 고난 속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 대속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이 말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당사자가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다른 이가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는 게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돈을 받고 매를 대신 맞아주는 일은 서양에도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흥부전’에 보면 흥부가 다른 사람 대신 곤장을 맞는 대가로 양식을 구하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살길이 막막했던 하층민들 가운데도 매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도 있었던 것입니다. 서양에서도 귀족의 자제들이 징벌을 받을 때 대신 매를 맞아주는 소년, 곧 ‘위핑 보이’(whipping boy)를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야만적인 풍속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도 그런 것일까요? 대속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며 가슴 저리게 깨닫는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설움과 고통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분증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거나 남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의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하셨습니다. 병든 사람이든, 귀신들린 사람이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이든, 철저하게 고립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주님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셨습니다. 아끼고, 존중하고, 귀히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그 가없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품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그런 경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철저히 자기 것으로 받아 안으신 예수님을 우리는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얼마 전에 저는 ‘콜레기움 보칼레’가 연주한 바흐의 ‘요한 수난곡’을 듣고 왔습니다. 그 가운데 11곡인 ‘코랄’의 가사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누가 당신을 그렇게 때렸습니까? 나의 구주여, 누가 당신을 정죄하고 고문하였습니까? 당신은 우리와 우리 자녀들처럼 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악행을 모르십니다. 바로 나, 나의 죄, 바다의 모래알과 같은 나의 죄가 당신께 고통을 주고, 때리고 쓰디 쓴 고문을 가했습니다.”(바흐, ‘요한수난곡’ 11곡 코랄)
죄 없으신 주님의 고통이 나의 죄와 허물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가슴 저리게 다가왔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줍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셨다는 말은 교리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는 자기의 허물과 죄성 때문에 처절하게 아파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구속의 은총을 경험합니다.
자기 죄와 부족함에 대한 예민한 자각과 회개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신다며 십자가를 신비화하는 것은 일종의 허위의식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처럼 세상의 모든 고통에 다 반응할 수는 없지만, 가까이 있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인류와의 연결고리가 생겼음을 깨닫게 됩니다. 욕망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심한 고립감을 느낍니다. 모두가 잠재적 경쟁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이들의 아픔에 반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이들과 사랑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게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 길을 찾은 사람들
베드로는 주님께서 몸소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가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본을 남겨 놓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부르십니다. 그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이고 평화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그 길의 새로움을 베드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벧전 2:23)
우리는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되돌려주고 싶어합니다. 되돌려줄 능력이 없을 때는 뒤에서라도 나를 모욕한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기도 합니다. 악순환의 고리가 작동하는 겁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조롱하는 무리를 보며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무지함과 나약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폭력을 폭력으로 응대하고, 모욕을 모욕으로 되갚아주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요? 불의와는 맞서 싸워야 하지만 그 방법이 폭력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미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마 5:44)하라고 이르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할 때, 다른 이들의 아픔을 내 것으로 수용하려 할 때 평화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b). 주님의 이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다른 이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모욕과 비방은 다른 이들 속에 있는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분열을 일으키기보다는 연결을 만드는 이들이라야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한병철 교수는 함께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효소(한병철, 앞의 책, p.24)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할 때 우리의 영혼은 맑아지고 정신은 깊어집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와 작별하고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삶에 책임감을 느끼고 그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려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벧전 2:24). 갚을 길 없는 사랑입니다. 이제는 철부지 신앙인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철든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고통의 심연으로 끌려들어가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아래에서 떠받쳐주어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런 작은 실천을 거듭할 때 우리 영혼은 주님의 마음과 깊이 결속될 것입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며 그리스도의 마음과 깊이 접속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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