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 342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신22:5, 9-12)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신22:5, 9-12) 다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질서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규례이다. ①남녀의 의복을 서로 바꾸어 입지 말라(5절) ②포도원에서 두 종자를 뿌리지 말고,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9,11절) ③소와 나귀를 함께하여 밭 갈지 말라(10절) 특히 여기서 소나 나귀를 함께 밭갈지 말라는 규례는 두 짐승의 보폭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밭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교훈한 것도 이 규례에서 교훈을 받은 것으로 여겨 진다.

예수의 체포(6)(막14: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막14:48) 예수님은 자기를 체포하러 온 이들에게 당신을 강도 취급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끌고 가는 데는 그렇게 많은 무장한 병사들이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통해서라도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말씀이었습니다. 진리를 말씀으로 가르쳤고, 병든 자를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무장 병사를 보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삼는 이들입니다. 진리에 전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는 진리논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진리 논쟁은 말씀의 논리와 삶의 능력에서 주어집니다. 말..

예수의 체포(5)(막14: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막14:47)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순간에 예수님 곁에 있던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들고 한 병사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를 베드로라고 지칭합니다. 워낙 성격이 급한 인물이니 그렇게 나설 만도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른 인물이 베드로인지, 제자 중의 한 사람인지, 그 이외에 예수를 따랐던 사람인지, 또는 예수를 체포하러왔던 병사 중의 한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소동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떨어진 귀를 만져 ..

예수의 체포(4)(막14: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막14:46) 유다의 입맞춤 신호와 함께 병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경찰이 피의자를 검거하는 장면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흉악범이라도 된다는 것일까요? 도주의 우려가 있으니 구속시켜야한다는 걸까요? 참으로 딱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는 과정은 여러모로 비정상적입니다. 앞의 묵상에서 몇 번 짚었듯이 제자에게서 배신당한다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제자의 배신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위대한 스승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위대한 스승 밑에서 훈련을 받은 제자라고 한다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런 제자가 나왔다는 건 스승이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말도 되니까요. 예수님에게서 어떤 범법 행위를 찾을 수 ..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딤전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디모데전서6:15-16)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비교되거나,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도 묘사될 수 없는 분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도 분명하게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라고 기록하여 가르쳐 주시니 감탄이 저절로 나올 ..

내 앞날은 하나님이 다 책임지셔! [2024. 2. 29. 목. 일터소명 묵상]

'내 앞날은 하나님이 다 책임지셔!'(시편 24:1-3) 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월남 이상재 선생은 경성기독청년회(현 YMCA) 총무로 활발히 활동하던 민족 계몽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전에는 독립협회에 가담하고 개화파 인사들이 투옥될 때 한성감옥에서 성경을 다시 읽으며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재 선생의 마음과 생각에 강하게 역사하여 그가 회심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멋진 유머리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이상재 선생이 YMCA 활동을 하면서 강연하는데 일본 ..

삶은 도전이다.

삶은 도전이다. 글쓴이/봉민근 왜 도전하지 않는가? 믿음은 도전이다. 세상은 최선을 다하는 자가 얻는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주는 법이다. 부족하면 구하고 부르짖어야 한다. 연약하면 하나님께 기대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낙오자가 된다. 기도하는 것도 도전이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인생에 맡겨진 사명이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공짜를 바라지 말라. 공짜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고 욕심은 죄를 부른다. 땀 흘려 대가를 지불하는 자가 얻는 법이다. 씨를 뿌려라.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둔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다. 인간은 밥만 먹는 식충이가 아니다. 먹는 것만 밝히는 돼지가 아니다. 일하라고 보냄 받은 사명자다. 일하기 싫은 자 먹지도 말라. 남들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을 안다는 것 (막12:18-27) / 김영봉목사

해설: 이번에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들의 이익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신도 신앙 운동이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여러 가지 점에서 달랐습니다. 그 중 하나가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의인들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부활에 대해 논쟁할 때 사용했던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도전합니다. 그들은, 형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위해 대신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한다는 율법 규정(신 25:5-10)을 일곱 형제의 가정에 적용하여 가상의 상황을 만듭니다. 맏형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후에 둘째부터 일곱째까지 차례로 형수에게 아..

죄의 경향성 (막 7:14-23)

죄가 가지고 있는 성질은 참으로 고약합니다. 죄는 반드시 죄를 낳습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는 살아서 죄의 왕국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듣고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습니다. 더러운 것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설물을 다시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마음이 가진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부패한 본성은 죄로 가득합니다.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입니다. 마음이 변화를 받지 않으면 죄는 춤을 춥니다. 회심은 마음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옛사람이..

흑암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한 자비의 빛 (막 7:24-37)

막 7:24-37 묵상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았단 이방 지역. 예수님께서 이곳에서도 복음을 선포하시고 구원과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악령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 나아와 고쳐주시길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은총을 베푸십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손을 대시어 치유하십니다. 흑암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한 자비의 빛입니다. 겸손한 믿음의 간구에 은총을 베푸시고 하나님 나라를 친히 이루어가심을 찬양합니다. 있는 이 모습 이대로 주 앞에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