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 342

열매 맺는 백성 (막12:1-12) 김영봉목사

해설: 성전 뜰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잘 지어 놓고는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납니다. 때가 되어 주인은 세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그를 때리고 빈 손으로 보냅니다. 또 다른 종을 보내도 동일하게 반응 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점점 악해지더니 나중에는 종을 죽이기까지 합니다(3-5절). 결국 주인은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6절) 생각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그 포도원을 영구히 차지할 마음으로 그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 바깥에다가 내던집니다(7-8절). 구약성경에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민으로서의 책임을 맡긴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열왕기상 18:20-21)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에 엘리야 선지자가 사역했습니다. 당시는 아합 왕이 이세벨 왕비와 더불어 우상숭배를 극심하게 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3년 넘게 비가 오지 않아서 사람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이때 아합 왕을 만난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자신이 맞서서 진정 하나님이 누구신가 대결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 (막 6:45-56)

예수님은 제자들을 벳세다 맞은편으로 가게 합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저녁쯤 아직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리 호수에 있을 때입니다. 마침 바람이 불어서 노련한 뱃 사람인 제자들도 힘겹게 노를 젓고 있습니다. 밤사경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옵니다. 이 모습에 제자들을 유령인 줄 알고 놀라서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내니 두려워하지 먈라고 말씀합니다.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칩니다. 제자들은 더욱 놀랍니다. 마가는 이 상황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무디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시며 위로자이심을 계시하심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였다면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성숙은 그리스도를 알..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을 멉니다.(막 7:1-13)

막 7:1-13 묵상입니다. 정결 규례를 지키지 않는 제자들을 비난하고, 예수님을 책망하는 기회로 삼는 종교지도자들.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이웃을 정죄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는 예수님.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의 내면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헛된 예배를 책망하십니다.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악행하는 종교지도자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을 멉니다. 믿음이 있다 하나 행함과 진실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경배하게 하소서! 주님! 저의 연약한 믿음을 긍휼히 여기소서!

저주 받은 주검을 처리하는 규례(신21:22-23)

저주 받은 주검을 처리하는 규례(신21:22-23)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아 죽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검은 나무 위에 매달았다(수8:29, 10:26). 그러나 비록 그가 저주받아 죽었다할지라도 그 시신을 나무 위에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었는데, 본문은 그와 같이 나무 위에 달린 시신을 처리하는 규례다. 한편 나무에 매달린 시체가 해지기 전에 장사 되도록 한 본문의 규례가 적용된 대표적 경우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해가 질 때 장사 되셨다(요19:3-42). 즉 예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극악한 범죄자의 저주 받은 모습으로 나무 위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31)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21:28-31) 맏아들을 자처하는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또 더 맏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23:23)고 따지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맏아..

겟세마네(11)(막14: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막14:41) 위 구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세 번째로 오시어 두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입니다. 우리 묵상공부의 본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루터번역은 이렇습니다. “아직도 자고 싶고, 쉬고 싶으냐? 그만하면 충분하다.” 공동번역도 루터번역과 비슷합니다. 복음서가 묘사하는 제자들은 중요한 장면으로 가면 갈수록 예수님과 엇박자를 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습니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는 제자들의 지위가 확실한 기반에 섰을 때인데도 제자들의 실수와 한계를 전혀 숨기지 않..

겟세마네(10)(막14:39,40)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막14:39,40) 어제 묵상의 마지막 단락에 오해가 따를지 몰라서 한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세 단계로 설명했습니다. 첫 단계는 눈이 감긴 상태, 두 번째 단계는 어렴풋이 열리는 단계, 세 번째는 환하게 열린 상태입니다. 이런 단계가 시험을 쳐서 점수를 매기듯이 확연하게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구별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겁니다.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단계, 조금씩 들리는 단계, 완전히 소리와 일치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 마지막 단계를 득음(得音)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겟세마네(9)(막14:39,40)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막14:39,40) 제자들이 피곤하기는 무지하게 피곤했나 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기도하기 위해서 주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시 잠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장면은 마가복음 기자의 편집 의도가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이 아닙니다. 잠시 한눈을 팔수는 있지만 이렇게 철부지 아이들처럼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위의 내용은 제자들의 기억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전승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복음서 읽기의 어려움입니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사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