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5 11

‘이 선’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다!(신19:14)

‘이 선’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다!(신19:14) 본문는 기업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명령이다. 오늘 날의 사회와 같이 토지의 소유를 증명하는 등기 제도와 같은 제도가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경계표는 각자의 땅을 구분 짖고 표시해주는 중요한 표식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배받은 기업은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하는 것으로,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영적인 축복과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을 예표 한다. 그런즉 그들은 이웃의 땅을 탐하여 경계표를 옮겨서는 안 되었으며, 이는 하나님 앞에 중한 범죄였다. 그러므로 ‘이 선’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야고보서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야고보서5:11) 사람이 인내를 하더라도 이유있는 인내, 소망이 있는 인내, 목적이 있는 인내는 할 수 있지만 이유도, 소망도 목적도 없는 인내는 인내하는 것이 몹시 어렵습니다. 욥기에 보면 욥도 고난이 닥치고, 욥을 몰아붙이는 아내, 욥을 좌절시키려고 몰려온 것 같은 친구들 앞에서 욥은 변명하기 바쁘고, 원망어린 말과 심지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저주까지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욥은 완전한 인내나 흠결 없는 인내를 보여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욥은 결국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

유월절 만찬 준비(1)(막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막14:12) 막 14:1절부터 예수님의 수난 전승이 시작된다는 사실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과 예수님을 배반할 음모를 꾸민 유다 및 대제사장들의 이야기에 이어서 막 14:12절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명실상부한 수난 전승이겠지요. 그 시작은 유월절 만찬입니다. 위 구절은 그 시점을 정확하게 언급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고 말입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니산월 15일입니다. 양은 그 전날 잡아야했으니 니산월 14일인 셈입니다.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객들로 인해 예루살렘은 차고 ..

배신(2)(막14: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막14:11)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은 거래를 맺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돈을 주기로 했습니다. 어제 묵상에서 잠시 거론한 것처럼 가룟 유다가 실제로 돈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위 구절도 그걸 전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양쪽의 거래가 맞아떨어졌고, 그 결과로 돈이 오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벌어진 이 흥정의 결과는 바로 앞에서 나온 어떤 여인의 고귀한 낭비와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한쪽은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다른 한쪽은 야합으로 인한 것입니다. 한쪽은 일방적인 베풂이었지만 다른 한쪽은 서로의 탐욕이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한쪽은 어떤..

배신(1)(막14:10)

'열둘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막14:10)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의 처음 등장은 제자 임명이 이루어진 막 3:19절입니다. 거기서 그는 이미 “예수를 판 자더라.”는 판단을 받았습니다. 이제 14:10절과 막 14:43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모든 구절이 예수님을 팔았다는 사실과 연관됩니다. 마태복음 27:3절 이하는 유다가 자기 행위를 후회하고 목매달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첨가합니다. 물론 마태복음만의 독립 전승입니다. 가룟 유다는 누군가요? 그에 관한 정보는 성서 이외에 없습니다. 성서도 그에게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편적인 성서의 정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을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팔았다는 것뿐입니..

시편 51편: 깨어진 심령으로

해설: 이 시편은 대표적인 ‘회개시편’이며, 신앙인들에게서 가장 사랑 받아 온 시편입니다. 찬양곡의 가사로도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편집자는 이 시편을 밧세바에 얽힌 다윗의 이야기에 연결시킵니다(삼하 11-12장). 완전 범죄를 도모하다가 예언자 나단에게 고발 당한 후에 자신의 죄를 자인하고 드린 기도에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18절과 19절은 포로기 이후에 시편이 편집되는 과정에서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깨끗이 씻어 달라고 청합니다(1-2절). 그가 그렇게 간구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3-6절).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말은 일종의 과장법입..

위기 관리 능력을 키웁시다! [2024. 2. 15. 목. 일터소명 묵상]

위기 관리 능력을 키웁시다! (사무엘상 17:34-35)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과 사울 두 사람의 인생은 위기를 겪어낸 ‘내공’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겪은 위기는 고작해야 집에서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나서는데, 그것도 하인과 함께 찾아다닌 것이 전부였습니다(삼상 9:3-5).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과 맞서기에 앞서 사울 왕에게 말하는 대로 훨씬 어린 시절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맹수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노라.(막 3:1-19)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음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병을 가진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손 마른 병을 가진 이를 데리고 와서 고쳐 줄지를 시험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지 질문하십니다. 잠잠하자, 완악함에 탄식하시고 노하십니다. 그런 후에 병든자를 고쳐주십니다. 정직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입니다. 그러자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 논의를 합니다. 복음이 증거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회심 아니면 저항입니다. 예수님을 죽일 논의를 하는 기득권들을 뒤로 한 채 많은 약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모였습니다. 유대, 예루살렘, 이두메, 요단강 건너, 두로와 시돈등 사방에서 모여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 글쓴이/봉민근 신앙생활을 잘하기란 실로 힘이 든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고통이며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고난의 길이다. 십자가를 말 그대로 달게 지고 간다는 것은 현실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말이다. 남을 가르치기는 쉽다. 하지만 자신이 십자가를 지려고 하면 어려운 길 좁은 길 좁은문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어떻게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을 감래하며 십자가의 길을 갔을까! 가죽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으며 목 베임을 당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자신의 목숨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사랑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게 한다. 결단을 하고 아무리 노력을 할지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고 주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가족.(막 3:20-35)

막 3:20-35 묵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 하나님 나라의 걸림돌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들. 곧 성령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미쳤다고 오해하는 예수님의 가족들. 예수님이 바알세블을 힘입었다 하는 서기관들.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입니다. 새로운 가족 질서를 말씀하시는 예수님. 혈연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맺어진 공동체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가족.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됨은 최대의 기적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일상의 삶이 예배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