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신성 모독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14:64)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유대의 최고 법정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단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어제의 묵상에 이어 오늘 조금 더 보충하겠습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놓여 있습니다. 즉 신의 본질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본질은 초월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또는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형상도 만들 수 없습니다. 형상을 만들면 이미 초월성이 상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창조자이십니다. 그의 창조 행위는 자연에 있는 것을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무(無)로부터의 창조입니다. 초월자 하나님에게만 이런 창조의 능력이 가능합니다.
초월성 문제는 타 종교와 크게 구별됩니다. 타종교는 자연의 위대함을 찬양합니다. 그 자연에는 신성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위대한 자연이 곧 신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태양을 섬기고, 자연의 여러 능력을 섬겼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그 모든 자연의 위대함을 피조물의 한계로 끌어내렸습니다. 찬양받을 분은 오직 세상을 초월하신 하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다른 인간과 똑같이 이 세상에 철저하게 의존해서 살았습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목이 갈하기도 했습니다. 외로워하기도 했고,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는 유대교에서만 대두된 게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사람의 한계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곧 가현설입니다. 어쨌든지 유대인의 하나님 표상에 따르면 초월적이지 못했던 예수님은 신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그가 신을 참칭하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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