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75

제34장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 이루어지이다” 구절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구절이 영어 성경에서는똑같이 "Thy will be done"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두 구절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주기도문에서는 그 말이 ‘‘하나님이여, 나에 의해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Thy will, 0 God, be done by me)"를 뜻한다. 반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당신의 뜻이 내게 임하게 하시어, 내 원대로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Let Thy will, 0 God, come upon me, let thin gs happen with me not as I will. but as thou wil..

제33장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자, 재능이 많은 자, 가장힘이 센 자라 할지라도 이 땅에 있는 인간과 우리 주 되신 하나님과의 차이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하는가!"라고 자포자기적으로 한탄한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다(욥 36:26).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했던 불안한 아테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올 위한 제단을 세웠다(행 17:23). 그들은 이미 위하여 제단이 세워진 많은 신들 외에 그들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신이 있으므로 그 신께 희생제를 드렸던 것을 뜻하지 않는다. ‘‘..

제 32장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여러분 자신의 뜻을 복종함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게 된다. 그것은 책에 기록된 딱딱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살아있는 영혼의 지식 그것 자체가 영생인 지식이다. 이것은 여러 종류의 이유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의지작용은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일하심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라고 기록해 놓았다. 먼저 소원을 두고 그 다음에 행하게 하신다. 비록 여러분 자신이 영혼 안에서 이 모든 의지 작용과 의지 활동을 하지만 그렇게 하게끔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신 것이다. ..

제 31장 잔잔한 물가에서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 한다면 의지에 관해서 훨씬 더 면밀히 다루어야만 한다. 의지가 작용하는 영역이 우리 조상들 시대에는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 문제 삼은 것은 과연 의지는 자유한 것이나, 아니면 구속적인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설교나 교리문답 공부서 조차도 그 이상으로는 인간 의지의 중요성이 취급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의지에 관한 영역은 개발되지 않은 채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 조상들, 즉 우리 이전 시대에는 의지롤 통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자라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의지는 책에 쓰여지거나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바에 의해 작용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의지를 ..

제 30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자연히 주님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나게 된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신앙은 완전히 정통주의이나 자신의 생활 태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자. 또 다른 사람은 자선의 생활에는 엄격하나 교리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자. 그러면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남을 놀라게 할 정도로 교리에 대해서 상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아는데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활동에서 구원을 추구하려고 하는 소위 행동파 기독 교인, 즉 실천적 기독교는 아주 올바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서 완전한 지식을 얻으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 중의 하나인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면, 이러한 하나님에..

제 29장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 간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에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생각, 상상력, 내적 체험 등에 의해서 얻어진다. 그러나 또한 그 지식의 일부는 우리의 의지(will)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근세에 와서 의지는, 옛날에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못했던 많은 사건들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중요시 되어졌다. 영향력 있는 철학의 한 학파는 지금까지도 인간의 의지를 가장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의 모든 다른 정신 활동들은 한쪽 구석에 밀어 놓고 별 관심을 쏟지 않는다. 이에 관련된 근본 사상은 인간 정신 중 의지만이 모든 것을 실현하고 실재를 창조하며 스스로 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람이 더 깊이 문제를 연구하면 할수록 의지는..

제 28장 내가 주를 본 즉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지성(intellect)으로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이 얻어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망라한 총괄적인 것이다. 그 지식은 모든 관찰과 지각작용의 종합적 산물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우리의 상상력, 보다 광범 위하게 우리의 표상 능력이 또한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피상적으로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답변하려 할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만일 여기에서 “영”이란 표현이 모든 육체성과 물체성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언급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만일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을진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표현할 수 있겠..

제 28장 '온전히' (2)

이 글 문두에 나온 질문은 타락한 인간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모든 장애물과 저항력을 타도 할 만큼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물어 본다할지라도 아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고 쓸모없게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지 못한 인간의 마음에 그러한 경향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타락의 결과로서,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어 그분을 찾기에 갈급해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탄할 일이 아니다. 진지하게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의 수는 적다. 그리고 그 안에 참 믿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수는 더 적다. 여러면에서 종교적인 사람들과 어울려 ..

제 27장 '온전히'

하나님을 찾는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시편 기자는 반박하고 탄식하면서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그분을 찾는 자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모든 세대의 사람에게 크게 감동을 주는 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란 구절을 읊조렸을 때는 본심을 속였던 것인가. 아니면 아삽이 황홀한 기쁨을 느끼며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시 73:23)라고 외친 것은 단지 영혼의 상태를 가장한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결코 아니다. 이 글 문두에 나온 질문은 타락한 인간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모든..

제26장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 형상

볼테르는, 완전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갖추신 예수님을 한갓 인간으로 취급해 버리고 마는 이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용감했다. 근본적 문제에 있어서 그들과 볼테르는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 역시 믿지 않는다. 이 시대의 불신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다른 점은 단지 감히 그런 참람한 말을 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 뿐이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극치의 행위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에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만, 점점 성장해감에 따라 그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신앙태도를 방관해 버리고, 그 영적인 진리는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