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27장 '온전히'

새벽지기1 2021. 8. 30. 07:06

 

 하나님을 찾는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시편 기자는 반박하고 탄식하면서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그분을 찾는 자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모든 세대의 사람에게 크게 감동을 주는 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란 구절을 읊조렸을 때는 본심을 속였던 것인가. 아니면 아삽이 황홀한 기쁨을 느끼며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시 73:23)라고 외친 것은 단지 영혼의 상태를 가장한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결코 아니다. 

 

이 글 문두에 나온 질문은 타락한 인간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모든 장애물과 저항력을 타도 할 만큼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물어 본다 할지라도 아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고 쓸모없게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지 못한 인간의 마음에 그러한 경향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타락의 결과로서,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어 그분을 찾기에 갈급해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탄할 일이 아니다. 진지하게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의 수는 적다. 그리고 그 안에 참 믿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수는 더 적다. 여러면 에서 종교적인 사람들과 어울려 보라. 그들을 바라보고 연구해 보고 그들의 담화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한 패가 되어 그들이 하는 대로 행동해 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무 외식적이며, 인위적이며 기계적인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을 발견하는 일을 얼마나 등한시하고 있는가 깨닫게 될 것이다.

 

심지어는 교회나 다른 어떤 곳에서 예배드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늘 기도 시간이나 다른 시간에 자신들의 영혼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질문을 거듭해 보아도 하나님을 찾기 위해 끌어당기는 힘이 인간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잡아당기는 힘을 가지고 그들을 끌어당기고 계신 것이다.

 

왜 하나님의 끌어당기시는 힘이 어떤 사람에게는 작용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용하지 않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듯이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영혼을 끌어당기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때에 그 힘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끌어당기시는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가? 영혼은 이해, 의지, 감정, 상상력 또는 무어라 명칭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일까? 이것은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지적이고, 교리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 하고, 어떤 이는 우애 있는 친교, 또 어떤 이는 뜻의 일치, 다른 이는 꿈과 이상, 또 다른 사람은 영감이라고 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여러 가지 다른 대답들이 나오게 된다. 여기에는 각자의 성질과 기질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상과 정의(定義)들에 대해서 예민하게 분석하는 사람은 확고한 교리적 고백에서, 행동파 사람은 실제적 결과를 가져온 자신의 헌신에서, 그리고 천성적으로 긴장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품으로 말미암은 애절한 열망에서, 또 상상력이 풍부하며 공상에 잘 빠지는 사람은 표현과 기발한 심상에서 자기 입장을 견고히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나 현재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고전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는 훨씬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즉 만사는 대개 사람들의 각기 다른 풍조, 학파, 경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람은 이렇게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행하는 것이다. 결코 만장일치를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어느 누구도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이상의 사실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한 특별한 한 가지 방법만을 선택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즉 여러분이 그분과 진실하게 사뀜을 가질 수 있는 방편을 막는 것임을 말해 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길에서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어야 함을 지적해 준다. 아무것이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가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 

 

위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영혼의 한 부분적인 힘으로써가 아니고 영혼 전체로써만 가능하다는 데 있다.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을 소유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 의지 상상력이나 우리의 생각이 아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것은 그것을 전체적이고 일관성 있게 또 정당하고 실재적으로 알고 바라고 숙고하는 영혼인 것이다. 여러 광선이 비쳐 들어와서 영혼의 생명을 일깨워 주는 한 초점에 모이는데 이러한 작용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을 단지 도덕적 문제로 취급해 버림으로써 잘못을 범하게 된다. 사실상 타락으로 말미암는 전반적인 손실은 영적인 생활에 부득이하게 일어나는 부작용들을 살펴봄으로써만 완전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훨씬 더 심각하게 다루어진다. 

 

이것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계명은 실천 가능한 것이다. 영혼은 이렇게 하기에 합당하게 지어진 것이다. 톡 털어놓고 말해서, 인간의 영혼은 그것이 정상적으로 작용할 때는 전적으로 그리고 전력을 다해서 하나님을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은 특히 이 점에서 전혀 비정상적으로 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이것에 관하여 영혼 자체는 그것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나쁜 짓, 특히 극악한 짓을 했을 경우라면, 적어도 그는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아가 무릎 꿇고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정신적으로도 용의주도한 범죄를 지었을 경우 마음은 우리를 괴롭힐 것이며, 큰 죄를 저질렀을 때에 양심은 거의 모든 경우에 그 잘못을 지적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어긴 데 관해서는 거의 어느 누구도 가책을 받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지 못한, 영적으로 큰 범죄를 지었으면서도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구속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상황은 거의 마찬가지이다. 또 흔히 볼 수 있는 예로서 어떤 사람들은 온종일 기껏해야 아주 적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들 능력의 극히 일부분을 하나님을 위해 의식적으로 일하고 나서 밤에 하나님께 무릎 꿇올 때에, 자신들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중의 10분의 9를 범했다고 할 때의 그러한 죄로서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인간 각자의 경향과 성질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편파적인 행동 역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지적인 경향이 짙은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교리공부에 몰두한다.

 

만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그는 이 말씀을 그런 일에 적용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적인 분석에서 얻어지는 것 이외의 지혜에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단지 머리로 아는 것에만 숙달해 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는 유명한 사상가들이 하나님의 본질, 사역 위격( 位格),속성 동등에 관해서 자세히 수록해 놓은 교리 체계를 열심히 연구한다. 이 부분에 몰두하고 푹 빠져 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에 대한 실제 지식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그런 태도에 대해 반박한다 ... 아니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믿음으로 말미암는 기쁨을 얻는다고 했단 말이야." 그러면서 그는 행동주의자답게 재산을 드려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며 전심으로 하늘나라 일에 헌신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교리적인 특성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교리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행동인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은 교리나 봉사에서는 즐거움을 전혀 못 느끼고 감정의 흐름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음이 평정되고 고상한 말을 하며 사랑에 대해 신비한 인식을 하게 될 때 에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상은 이상들과 상징들을 중요시하며, 그의 사상이 자신의 영혼의 눈앞에서 어떻게 묘사되는가 하는 것에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의 환상 활동인 것이다. 사도 바울도 깊은 영적 체험과 삼층천에 이끌려 올라갔을 때 기뻐하지 않았는가?
이에 덧붙여서,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것들에는 영감, 기억력을 불러일으키는 것, 영혼 속에 급변하는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혼이 하나님을 사모할 때에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는 감동과 반응들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느끼게 된다.
 
실로 안타까운 점은 이 모든 활동들과 힘과 노력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쓰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대다수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고집하며, 마음을 다 하는 대신 마음의 일부분으로만 하나님을 찾고 그리함으로 자신들과 같지 않는 방면에서 구원을 받으려는 형제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다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신자들은 "마음의 일부분만으로”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참으로 경건하며 의롭다고 착각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마음의 나머지 부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