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규약적 종교에 대한 비판
'규약적 종교'(『스피노자론』)는 신의 속성 및 특성, 세계와 신의 관계, 예배 및 의례와 관련된 교리, 도덕적 가르침에 관한 교리 등을 포함하며, 규약적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이런 교리적 내용들 대부분에 대한 비판을 담고있다.
i) 규약적 종교의 신관에 대한 비판
규약적 종교는 제도화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포함한다. 이 종교들은 구체적인 교리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인격신관을 공유하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규약적 종교의 교리들은 신을 인간처럼 지성과 의지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정과 욕망을 갖는 존재로 묘사하곤 한다. 특히, 이 종교들은 공통적으로 신을 전지전능하며 최고로 선한 비물질적 존재로 간주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전능함, 전지함, 지고지선함이 신의 본성이나 특성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전능함에 대한 비판은 『에티카』의 근본 주장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EIIP3S). 왜냐하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전능함 개념은 스피노자가 거부하고자 하는 자유의지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전능한 신은, 스피노자에 따를 때, 무엇이든 마음대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정한 바를 집행할 수 있는 절대군주와 유사하다. 물론 규약적 종교에서 말하는 산은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는 폭군이 아니라 전선함과 전지함이라는 또 다른 특성에 의해 결정하고 행동하는 ‘도덕적 군주’ 혹은 계몽적 군주’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세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전능함과 자연의 필연성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이따금씩 우리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서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행위와 관련해 가능성 혹은 우연성과 필연성의 양상을 구분하긴 하지만, 신의 관점에서 봤을 때 “신의 권능하에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는 모든 것은 필연적"(EIP35)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필연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전능함은 신의 본질이나 특성에서 제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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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인용할 『에티카』의 약어는 다음과 같다: A(공리) C(따름정리) D(정의) Dem(증명) P(정리) Pref(서문) S(주석) C의 S(따름정리의 주석) App(l부 부록). 이하에서 『에티카』 인용은 E 다음에 로마자로 장을 표기하고 정의나 공리 및 따름정리의 번호를 붙인다. 스피노자 저작은 컬리(E. Curley) 가 번역하고 편집한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와 뽀트라(B. Pautrat)의 라틴어·프랑스어 대역본 Ethique (Edition du Seuil 1988)를 저본으로 했다. 이외 스피노자 저작에서 『신, 인간, 인간의 행복에 관한 소론』은 KV로, 『지성개선론』은 TdlE로, 『산학정치론』은 TTP로 약칭할 것이다.
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의미의 전지함 역시 신의 본성이나 특성이 아니라 신의 명목적 성질(propria)로 그 존재론적, 인식론적 지위가 격하된다. 스피노자는 신의 본질(essentia) 혹은 속성(attributum) 과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신의 특성(proprietas), 그리고 신의 명목적 성질을 구분한다. 이러한 명목적 성질들은 본질이나 속성처럼 어떤 존재를 존재하게끔 하거나 인식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특성처럼 본질로부터 직접적으로 추론되거나 귀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본질과 분리 불가능하게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양태(modus)라는 점에서 명목적 성질이라고 부를 수 있다(KV 1부 2~7장). 이는 신의 모든 속성이나 어떤 특정한 속성과 관련지어 다시 구분될 수 있다. 즉 자기원인, 무한성, 영원성, 필연성 등이 전자에 해당하는 명목적 성질이라면, 전지함, 편재성 등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의 전지함은 사유라는 신의 속성과 분리 불가능하지만 그 속성으로부터 직접 추론되거나 귀결되지는 않는 신에 관한 명목적 규정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요 14:8)라는 순진한 빌립의 발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말은 그 단순함으로써는 어린 아이와 같다. 그러나 이미 그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의 요청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하나님에 관해 머리로만 알려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즉 하나님 자신을 알기를 원한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버지를 나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한 편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몇몇 지역에 있어서 종교 생활은 너무 교리에 치우쳐 있다. 이것은 부득이한 일로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교리적 표현은 절대 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교리가 너무나 편파적인 때는 위험하다. 복음서와 서신서 사이에도 교리의 차이가 있으며 서신서에서는 교리적 논쟁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조차도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주님과 서기관들과의 논쟁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초대 기독교는 후대의 기독교보다 훨씬 좋았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의 설교와 찬양 그리고 성찬식 거행에는 얼마나 큰 기쁨이 있었는가. 그런데 후대의 형식적인 예배는 초대 교회 당시와 비교해 볼 때에 얼마나 삭막하고 무감동적인 것인가. 초기에는 생명이 강물같이 흘렀다. 그런데 후에는 모래 위에 가늘게 홀러가는 물줄기를 제외하고는 물이 말라버린 강바닥 밖에 없는 것이다. 아, 교리에 치우친 종교 생활이 신자들을 이렇게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자, 빌립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바라는 대상이시며 그는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혼의 요구에 못 이겨 그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말한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만일 여러분이 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라면 당연히 여러분은 "저는 결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눈으로 봄으로써 어떤 인상을 받는 것은 자명(自明)한 것이다. 이것은 신약과 구약 두 책에서 하나님을 보는 문제가 늘 앞에 언급된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일찍이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기도했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답변하셨다. 그리고 여러분은 신약시대에 바울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고후 3:48) 라는 진실을 말하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고 있다. 이것이 이 땅에서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천국에 가서 보다 완전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성경이 말해 주는 생명은 이와 같이 감동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을 들을 때에 모든 삭막함은 다 사라져 버린다. 이것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보고, 그분을 쳐다보고 그리고 나서 진지하게 이 생명을 주는 통찰력을 인해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 즉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청은 영생을 얻기 위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훌륭하게 취한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계신 하냐님을 간절히 사모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러분 밖에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아주 명백하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여러분 주위에 독립된 개체로서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여러분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에 한해서 말이다.
어느 누구도 세상 전체를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세상을 본다 해도 단지 단편적이나 부분적으로 우리 시야가 미치는 한도 내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여러분 이 세상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세상에 대해서 갖는 개념이 아무리 넓다 해도 무한하신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단지 형태, 형상, 모양을 가진 것을 보되, 시야에 미치는 것에 한해서만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라 하였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주위에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그분을 물질화하는 것이며 영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이 된다.
바로 이런 데서 우상 숭배가 들어오게 된다. 우상 숭배란 이런 것이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올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우상 숭배는 사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신앙심에서 부터 나온다. 신전을 세우고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는 사람들은 민족 중에서 몸쓸 사람들이 아니고 최고의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 민족들 가운데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오"라는 울부짖음이 드높은 것이다. 그래서 사제는 그들이 만든 한 조상(影像)을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을 자신들에게 가까이 오게 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실상은 그 초라한 조상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됨과 동시에 하나님 자선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죽기 전에 현명한 충고를 해 주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따라서 이 두 가지는 계속해서 서로 대립된다.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는 절박한 부르짖음은 교리, 신앙개념, 신앙 형식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자 하는 영혼의 절규인 것이다. 이것은 경건하게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목말라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반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한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줄 수도 없고, 눈으로 그를 보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신 것이다. 그분을 눈에 보이는 한 현상으로 냐타내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그러한 노력을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고 그분으로부터 훨씬 더 먼 곳으로 떨어져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될 때까지는 쉬지 않고 노력하겠노라는 내적 충동과 그러나 한편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면 동시에 그 분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서로 충돌되는 인식들의 해결 방안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 들어있다. 즉“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건 어째서일까? 여러분 밖에만 볼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도 볼 만한 대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여러분 자체 속에서가 아니라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소유하고 하냐님의 형상을 되찾은 여러분 속에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 예수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빌립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인자이신 주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해서 여러분도 역시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 신전에 있는 가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메시야이신 주님 안에서 참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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