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26장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 형상

새벽지기1 2021. 8. 29. 08:31

볼테르는, 완전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갖추신 예수님을 한갓 인간으로 취급해 버리고 마는 이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용감했다. 근본적 문제에 있어서 그들과 볼테르는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 역시 믿지 않는다. 이 시대의 불신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다른 점은 단지 감히 그런 참람한 말을 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 뿐이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극치의 행위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에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만, 점점 성장해감에 따라 그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신앙태도를 방관해 버리고, 그 영적인 진리는 마치 자신들과는 무관한 어떤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아주 가혹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장해 가면서 영적으로 더 깊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 미성숙한 확신으로 인해서 그들은 의심 없이 자신들이 정신적으로 향상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원하며 더 굳은 산앙을 갖고자 했던 아주 축복받은 신자들은 어린 시절의 신앙 차원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묵상 한다. 그리고 단순한 교리 분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더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영혼의 활동을 통해서 영적인 감동과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본다는 것은 육신적인 눈으로 보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육안으로는 가장 풍부하고 뚜렷하게 그리고 또 완전히 볼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 인간이 보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육안을 갖지 않으신 채, 영적이고 직접적으로 보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시고 그에게 보는 눈을 선물로 주셨을 때에, 인간이 받은 시력은 원래 영적이고 본질적이며 직접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또한 인간에게 육신을 입히시고 물질 세계로 그를 이끌어 오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이 세상을 볼 수 있는 육안을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

 

우리의 감각적인 육안은 단지 물질세계만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체의 일부인 눈은 이 보이는 세상 이외의 다른 인식에는 기여할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과 다른, 더 깊고 더 풍요로우며 훨씬 더 광활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는 데 이 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 우리 인간은 또 다른 눈을 받았는데 그것은 영혼의 눈인 것이다. 영적인 눈에 대해 우리의 육안은 부수적 도움을 주는 종속기관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은 영적인 세상과 보이는 세상 두 가지가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눈에는 영혼의 눈과 육신의 눈 두 가지가 존재하며 결과적으로 시각도 영으로 직접 보는 것과 육안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는 것, 즉 영적으로 보는 것과 외관적인 것을 보는 것 두 가지가 있다.

 

 본다는 동사의 이상적 인식에 대해서 고려해 보자. "당신은 내가 경우 바르다고 본다”라고 말했을 때의 본다는 것은 감각적인 눈에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전해지고 논의되고 설명되어진 것을 언급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감각적 눈으로 보는 유치한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신 영을 보아야만 한다.

 

제26장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 형상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여러분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 중 여러 구절들에 대해 떨림과 움찔함을 느낀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마 10:37)란 말씀 등을 들을 때에 말이다.  오늘날 많은 대중 앞에서 어떤 사람이 감히 이와 같이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모든 청중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해 버릴 것이다. 더 나아가 누군가가 여러분의 방에 들어 와서 당신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면, 여러분은 곧 온갖 방법올 다 동원해서 그를 내쫓아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바로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며, 여러분은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것이 진리라는 것과 그 말씀을 순종해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한 빌립에게 예수께서 답하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란 말씀 역시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다. 주님을 믿지 않고 그분 안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미친 자로 여기고 더 이상 상대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취사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러한 무모한 주장을 하고 나설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님을 경배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러한 인상적인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 하느냐 거역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을 섬기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법정에서 공회와 유대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인정한 주님에 대해서 참람한 말을 하였다며 사형을 언도해 버렸다. 주님을 섬기지 않던 그들로는 아주 타당한 처사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보지 못한 그들은 주님을 참람한 자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잘못, 혹은 지을 수 없는 죄상은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입술로는 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정작 주님 안에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란 사실을 부인해 버렸던 것이다.

아직도 그러한 경우가 있다. 종교적 통찰력이 밝게 비추이는 신앙시대에는 이전에는 그렇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러다가 오늘날과 같이 종교적 통찰력이 줄어들고 약화되는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도외시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께 대해서 “이상주의자", "참된 신앙의 표상", "신앙적 영웅"' "성스러운 순교자"동의 명예로운 칭호를 붙여 주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받으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은 신이시며 동시에 인간이 되시는 예수님을 위대한 한 인간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 말들은 양심을 마비시키며, 예수님의 신격(神格)을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감격하여 도마와 더불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막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는 것은 영혼의 눈으로써 영적으로 보는것을 뜻한다. 우선 여러분은 예수 안에는 다른 거룩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영적인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예수의 내적 자아에 대해서 더 연구해 나가면, 여러분은 예수 안에는 영적인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존재한다는 것, 즉 더 명백하고 완전하며 풍부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심지어 가장 최고의 사람들보다 더 고상하고 풍부하고 완전한 영적 상태를 가졌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주님 안에는 훨씬 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내면이 있기 때문에 마침내 당신은 그분 안에서 영적인 활력들과 빛들이 여러분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충만하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예수 안에는 영적인 것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차원을 훨씬 초과할 만큼 존재한다. 즉 예수의 영성은 무한한 것이다. 그분은 다른 어떤 인간과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질적으로 다른 영성을 지니고 계신 것이다. 그분의 영원한 완전함이 당신을 향해 빛을 발한다. 그때에 모든것이 여러분의 영혼의 눈앞에서 변화한다. 무의식적으로 여러분은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세계로 통과하여 마침내는 당신이 예수를 통해서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인식하는 분이 하나님 자신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당신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

그러나 여러분의 이러한 체험이 성육신하신 말씀, 즉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육안으로 본 것과 전혀 관계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예수를 자세히 살펴볼 때, 여러분은 그분의 영혼과 개인적인 육신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여러분은 영혼으로 통하기 위해서 육체를 제거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시고 수고하셨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은 완전한 표현이며 모습이며 신비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 가운데서 조차도 가끔 행복할 때에, 그들의 얼굴, 눈, 입술 말 태도, 행동에 그들의 영혼이 반영되므로, 그들의 외모를 통해서 그들의 내심을 알게 될 때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경우에 있어서는 단지 무한하시며 더 강렬하시며 가끔이 아니라 늘 그러하시다는 것이 다르지만 말이다.

주님의 외모는 틀림없이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분이 풍기는 인상은 아주 놀랄만한 것이었다. 여러분이 주님의 거룩한 눈이 얼마나 정열적이었으며 그분의 얼굴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분의 훌륭하게 조절된 음성이 어떤 감명을 불러 일으켰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곧 여러분은 예수의 육신적 외모는 그분 안에 하나님의 신성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오히려 육체에 신성을 충분히 담을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마치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께서 이 보이는 세상에 오셔서 예수를 본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매혹해서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한 것 같다.
  

만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인간들이 타락하기 이전인 에덴동산에 있던 상태였다면 모든 사람들은 즉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영안을 가진 인간들에게 있어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 계셨으나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타락한 인간의 영안 앞에는 베일이 내리워져 있었는데, 오직 하나님이 이 베일을 걷어 주셨을 때에만 인간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