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고백 외에 우리를 인간의 능력 이상으로 들어올려 궁극적으로는 모든 감각적 유혹을 물리치게 해주는 생각은 없다. 따라서 자연히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 앞에 경배함에 있어서 물질적이며, 감각적이고 어떤 형태를 지닌 것은 그 무엇을 막론하고 개입 할 여지가 없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진리는 여러분 존재, 영혼 그리고 심령 속에서 여러분을 구속하며 괴롭히는 모든 쇠사슬로부터 영적 존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물론 이 상태에서 여러분은 또한 개인적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 속의 모든 사랑을 다하여 영이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이 사실은 모든 우상 숭배, 모든 피조물 숭베 거룩하지 않은 형상들에 대한 모든 충성심이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우상 숭배를 불러들이고, 고대 민족들의 몰락을 촉진시킨 모든 정욕적인 잔인성을 배재시킨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이 말은 여러분 인간 존재를 모든 보이는 세계 그 위로 들어 올리며 여러분의 정신을 눈으로 볼 수 없는 더 높은 영역 즉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빛 가운데로 들어 올려 준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면 그분은 이 모든 보이는 세상과 무관하며 그분은 산들이 생겨 나기 전에 이미 존재하셨던 것이며 물질적인 것이 전혀 창조되지 않았던 영원한 시간이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만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다음 가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여러분의 육체적 죽음이 여러분 존재의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 비록 죽은 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단지 영적인 존재로 지내게 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미 이 땅에서 깊은 만족을 누리며 만일 필요하다면 여러분은 모든 세상을 경멸하고 고상한 영적 신분만을 유지하며 영적으로 하나님과 최고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고백이 아무리 유력하며 비길 데 없이 풍성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죄로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잠시 사탄과 모든 귀신들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에 이것을 아주 강하게 느낀다. 자신의 교양이 높으며 훌륭하게 성장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사탄과 귀신들을 단지 빈약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조작물로 간주해 버린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자칭 교화되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시며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으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좋은 구절을 넣으셨다 “하늘에서’’라는 말은 "당신의 천사들에 의해서’’란뜻이다.
육체를 가지지 않고 다만 영으로 존재하는 천사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만일 사탄이 악하게 지음 받지 않고 원래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하고 총명하게 지어진 피조물로 천사들 중에 속했었다 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역시 영적인 존재이며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 또한 영물들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은 죄를 순전히 영적인 것으로 만들며 죄에서 감각적인 요소를 제거해 버리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방탕함과 술 취함을 포함한 모든 죄가 정신에서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다음과 같이 기도한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 13).
그러므로 사회 전반적으로 술 취함이나 폭동 또는 간음만이 비도덕이라 여기며 자만, 자아 과시와 그에 따라 다른 사람을 과소평가하고 비꼬는 것, 분노와 적개심은 훌륭한 사람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고백은 아주 무서운 범신론, 마침내 자기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게 끔 만드는 교만한 자만심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심지어 기독교 신자들 간에도 어처구니 없는 착각이 일어나서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이 ‘‘옛사람’’이 범했던 모든 정욕적인 죄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멸망당하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이것은 메이터링크(Maeterlinck) 학파에서 범한 잘못이 지금 다시 철저하게 반복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 속에 있는 순수한 영혼은 육체가 저지른 정욕적 잘못으로 인해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영혼이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닫게 함으로써 이 모든 잘못들을 전복시키고 있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과 아울러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인격적인 사역이며, 우리와는 대립되기도 하고 또한 우리편에서 계시기도 하는 인격자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숨어 있는 세력이나 모든 창조물을 지배하는 원동력도 아니고 또한 막연하고 알지 못할 작용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은 아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며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며 그분 안에는 거룩한 사랑이 용솟음쳐 흐르고 있다. 그분은 인격적인 분으로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셔서 우리와 함께 대화하시며 동행하신다. 우리와 함께 잠자리에 누워 밤을 지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한 장막 안에 거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인격적 행위로서의 하나님의 사역들에 관해서 보여주며, 하나님의 얼굴, 주님의 입, 그 분께서 우리에게 향하시는 귀, 거룩하신 분의 발자국, 그분께서 은혜로 우리 위에 얹으시는 손, 그 속에서 모든 저항을 물리치시는 능력 있는 팔에 관하여 언급해 준다. 이 모든 것은 넓은 범주에서 의인화, 즉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한 그것 이상의 것이 있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 우리의 눈, 귀, 입, 손 그리고 팔은 단지 우리의 내적인 능력의 구체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듣고 보고 말씀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싸우신다는 것은 인간의 방식대로 비유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은 본래 하나님 속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에게도 나타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여호와의 팔”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막연한 힘이 흘러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내재하는 능력과 밖으로 흘러나오는 능력을 주관하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정하신 목적을 향해 그 능력이 흘러가게 하신다는 것, 도한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그것을 사용하시거나 아니면 사용치 않고 머물러 두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또는 우리를 대항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 하시는 것은 보다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호해 주거나 아니면 공격자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 팔을 들어 올리는 인격적 행위와 같은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 1) 라고 묻는데 이제 이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한번 적용시켜 보겠다 ‘‘여호와의 팔이 너희에게 나타났느뇨?" 바로 이때에 이 질문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존재나 그분의 능력의 유무, 그리고 하나님 능력 발휘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에 대해 막연히 일반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질문은 여러분의 인생 체험 속에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의 체험 가운데 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몸소 여러분과 만나시고 그분께서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오셨는가, 자기의 친구나 혹은 적수에게 하듯이 여러분과 개인적 관계를 맺으셨는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이런 진지한 인격적 관계에서 어떤 때는 여호와의 팔이 여러분을 막아주고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들어 올려졌으나 또 어떤 때는 여러분을 대항해서 여러분을 패배시키기 위해 여호와의 팔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보았느냐 하는 구체적인 질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는 주님을 전적으로 섬기는 성직자들의 영적 생활에서도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던 모세와 같은 체험이 부족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인간에게 하듯, 씨름을 했던 야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 그 영향력에 대해서만 막연히 알 분,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자기 자녀에게 다가 오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자기 자녀를 바라보시며 그분의 귀로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아이에게 자신의 손을 얹으시고 자신의 능력의 팔로 자녀를 감싸 주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찬양은 드리지만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침상에서 그분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며 자기 위에 와 닿는 그분의 거룩한 숨결을 느끼지 못하며, 그 속에 모든 확신과 구원이 들어 있는 능력의 팔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 읽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려는 잘못된 경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동불이요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우리의 영혼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얼굴을 맞대고 우리와 만나시며 사람이 자기 이웃과 대하듯 우리와 교제를 나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시면서 또한 우리의 눈 앞에 자기를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
'좋은 말씀 > 카이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25장 종교 비판자로서의 스피노자 (0) | 2021.08.28 |
---|---|
제 24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 (0) | 2021.08.27 |
제 22장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0) | 2021.08.25 |
제 21장 주의 종을 찾으소서 (0) | 2021.08.24 |
제 20장 주의 얼굴빛에 (0) | 2021.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