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28장 내가 주를 본 즉

새벽지기1 2021. 9. 1. 06:4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지성(intellect)으로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이 얻어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망라한 총괄적인 것이다. 그 지식은 모든 관찰과 지각작용의 종합적 산물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우리의 상상력, 보다 광범 위하게 우리의 표상 능력이 또한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피상적으로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답변하려 할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만일 여기에서 “영”이란 표현이 모든 육체성과 물체성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언급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만일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을진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어떤 이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처럼 어떤 형태나 우상 형상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의 생각에 의한 고안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조각품이 영생이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는 없다. 우리는 실재(reality)를 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어떤 이는 하나님은 절대 영적 존재이시므로 하나님에 관해서 상상한다거나 하나님을 유형적인 어떤 형체로 표현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설명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이사야 6장 1절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본 환상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이 그것을 본 연대까지 언급하면서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사야가 자신 밖에 있는 어떤 것을 보았는지 아니면 자신의 내적 환상 영역에서 그렇게 나타내진 어떤 것을 보았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여하튼 이사야는 하나님에 관한 환상을 보았고 선지서에 그 환상에 대해서 묘사해 놓았던 것이다. 아주 뚜렷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사로잡은 중요한 환상은, 그 의 나머지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 준 것이다. 

 

이사야의 선지자로서의 기름부음, 영감과 하나님의 음성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존경하는 우리들로서는 이사야를 종으로 부르시고자 하신 소명적 환상을 단지 불건전한 공상의 결과로 취급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한 여러 방법들 가운데 이것은 비록 순간적인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게끔 자신을 냐타내 보여주셨던것 이라고. 

 

그러한 예는 많다.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는 천사가 나타난 기사들, 그리고 성육신하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사들 역시 하나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형체가 없고 비물질적인 영적 존재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천사들이 나타나서 이야기하고 무슨 일을 행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산헤립의 군대를 쳐부순 천사와 신약시대 사도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 준 천사 등이 그 예이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는 오직 영으로만 존재 하셨다. 그런데 그 이전에 자신의 모습을 뚜렷이 냐타내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 예로 아브라함은 메시야이신 주님을 자기의 장막 안에 모셔 들여 음식을 대접해 드리며 기쁘시게 해드렸던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들을 비웃으며 순전히 꾸며낸 이 야기라고 취급해 버린다. 그러나 보다 이면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심리학자들은 그 사실에만 머물지 않고 그 이야기의 훨씬 더 고상하고 본질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그분께서는 구약성경에 나온 그런 기사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그 사건들의 중요성을 확증하셨다. 이것을 볼 때에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영적 존재들은 그들이 모습을 나타낼 경우, 비록 그들의 본질은 무형적인 것 이지만 우리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영적 대상들을 구체화시켜 나타내 주는 성경의 기록은 한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그때에 그들은 항상 인간의 모습을 지닌다는 것이다. 능력과 영광의 상징인 그룹(Cherubim)은 짐승 형상 즉 사자와 비슷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과의 모든 만남에 있어서, 천사, 메시야, 또한 이사야의 경우 하나님이 자산의 나타나심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복장을 하고 인간이 쓰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사가 나타난 어떤 구절에도 그것이 (짐승의 날개를 모방한) 날개를 달고 있었다는 표현은 없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 보좌 주위에 날아다니는 스랍(Seraphim)에 관해서는 날개가 달려 있다는 기록이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영적 존재들이 인간 모습으로만 묘사된 데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창조와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또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인간은 이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이리하여 인간과 이 형상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직접적으로, 또는 천사들을 통해서 나타내시기 위해서, 자신을 자신의 본체의 형상에게, 그리고 그 특별 형상으로부터 인간에게 넘겨주신 일은 너무나 당연한 처사가 아닌가?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생각은 영적 존재는 구별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동일한 모습으로(even Sameness) 계시는 것이 아니라, 구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는 무한한 생명의 충만함으로 스스로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 하시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한 이 형상 속에는 늘 그것에 의해 하나님 자산을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계시해 주시기 위해 변화된 전달체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신 사실에서 절정에 달한다고 이전의 하나남 천사 등의 인간 모습으로서의 나타나심은 이 결정적 사건의 예표에 불과한 것이다. 또 이렇기 때문에 영생인 하나님에 관한 더 나온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정신의 표상 구성(representation-making) 상상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 비밀에 대한 실마리는 영과 물질, 하나님과 이 세상은 서로 대립되므로 반드시 구별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범신론(凡神論)에 빠져 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 편으로는 하나님 자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세상만물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생각과 말씀이 있었음을 나타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과 육신적 죽음 후에는 육체를 떠난 영혼이 부활할 때까지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단짝이며, 영혼은 육체를 통해서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삼중 활동 영역이 기인된다. 하나는 완전히 영적인 활동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를 통하여 육체의 도움을 받아 하는활동 영역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혼합 영역이라 불리는 곳으로, 그곳에서 영은 단순히 영적으로 활동하되 감각적 세계에서 나온  자료를 가지고 활동하는 영역이다. 

 

그런데 비유법 사용은 이에서 제외된다. 비유를 사용할 때 우리는 그것이 현실 밖의 은유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의로운 자는 사자처럼 용감하다고 할 때 실제로 맹수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꿈은 이런 것들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꿈을 꿀 때에 우리는 어떤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그 때에 우리는 거기에 폭 빠져 들어가게 된다. 계속 이야기하며 꿈 속에서 누가 우리를 건드리면 진짜 있었던 것처럼 느낀다. 꿈에 나타난 모든 광경들은 너무나 실제적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꿈에서 도둑에게 위협을 받으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자기 옆에 도둑이 실제로 서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상적인 어떤 것이 우리 감각에 실제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환상의 경우에 더 강렬하다. 그러한 환상들은 어떤 사람의 말대로, 잠자는 동안이 아니라 낮에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에서 꾼 꿈들인 것이다. 특히 동양인들이 환상에 잘 빠지나,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꿈과 환상은 모두 아주 명백하고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 있어서 안타까운 일은 과학이 아직 이러한 영적 작용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학이 전혀 관여하지 못하지만 실제적으로 활동하는 영역이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불신앙적인 과학자들은 의기양양하게 딱 잘라 이러한 모든 실재를 부인해 버린다. 반면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설명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감사하게도 성경이 그것에 관해서 가르쳐 주는 바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우리는 표상(형상) 구성 기능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 확립에 불필요하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인간의 표상 구성 기능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하는 지성인은 대담하게 성경의 모든 내용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명령은 우리를 구속한다. 즉 우리는 상상에서 조차도 구체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위해서, 형상 구성하는 기능은 마치 이사야의 소명이나 아브라함에게 냐타나심과 같이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 속에 그것을 불러일으키실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형상구성하는 요소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도의 성육신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후에 육신을 입으시고, 밧모 섬에 있는 요한에게 모습을 나타내셨다. 이때의 형상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 우리를 위하여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나타나심이었다. 그리고 이것만이 우리의 상상적 기능을 지배할 수 있고, 지배해야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부언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어떤 것이 보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높은 수준에 있으면 있을수록 이 특성이 더 많이 보여질 것이다. 그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못할수록 이것이 조금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아주 영적일 때 같은 영성을 가진 다른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의 형제 속에서 하나님 형상의 일부를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도 높은 소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신의 전인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거기서 보게 되는 것이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