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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장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새벽지기1 2021. 9. 2. 07:22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 간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에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생각, 상상력, 내적 체험 등에 의해서 얻어진다. 그러나 또한 그 지식의 일부는 우리의 의지(will)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근세에 와서 의지는, 옛날에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못했던 많은 사건들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중요시 되어졌다. 영향력 있는 철학의 한 학파는 지금까지도 인간의 의지를 가장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의 모든 다른 정신 활동들은 한쪽 구석에 밀어 놓고 별 관심을 쏟지 않는다. 

 

이에 관련된 근본 사상은 인간 정신 중 의지만이 모든 것을 실현하고 실재를 창조하며 스스로 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람이 더 깊이 문제를 연구하면 할수록 의지는 힘이라는 사실을 더 확고하게 깨닫게 되고, 의지란 모든 다른 기능들을 지배하고 부리는유일한 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확실히 증명해 주는 사실로서 현재에도 거듭 관찰된다. 모든 삶의 부분에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권세를 장악하고 약자들 위에 군림한다. 사람이 의지가 상당한 힘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인간세계에서였다. 동물계에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현상이 보여지지만 우리가 짐승들에 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인간에게서 보여지는 의지의 힘에 대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안전 할 것 같다.

 

그러나 물론 의지를 다룸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에서 끝날 수는 없다. 의지의 현상은 너무나 두드러지고 그 세력은 아주 당당한 것이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의지는 다만 파생적인 것에 불과 한 것이다. 원래 사물의 원상태에 있어서 의지는 인간의 밖에 존재해 있었고 인간 자신은 모든 것을 성취하셨던, 위대하고 높으신 보편적 의지(Universal will)의 산물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경배되어 왔거나 사단으로 비난받아 왔던 것은 이 보편적 의지, 즉 모든 만물의 근원인 위대한 의지력인 것이다. 세상은 지혜나 사랑을 조금도 냐타내지 않는다. 세상은 커다란 의지력의 산물에 지냐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충분한 상태에 놓여있다. 

 

우리 속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작은 규모의 의지가 있으므로 인간이 해야 할 최상의 의무는 자신의 의지를 훈련하고 개발하여 유력한 행동에 적용시키는 것이며 또 이 강하게 연단된 인간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보편적 의지 앞에서 자활(自活)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 그리고 역사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우리의 전 삶을 하나의 힘으로 귀착시킨다. 승고한 유일한 것, 우리 속에서 거룩하다고 일컬어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개인 의지인 것이다. 

 

이렇게 똑똑한 척 주장하는 철학은 과격하게 모든 종교 특히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그 주장에 대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 볼만한 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의지를 앞세우는 유사한 경향을 보이다가 마침내는 모든 다른 기독교 신앙표현을 의지에 종속시켰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점점 더 교리 설명을 등한히 하고 종교적 감정이나 느낌을 무시한 채 언제나 오직 활동과 힘의 표현 즉 의지 표현에서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는 욕구와 경향을 보여 주었던 교회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하지만 한때 교회의 이러한 사상과 경향은 우주를 의지의 견지에서 설명했던 철학 사상에서 따오거나 빌려온 것이 아니고 인간 삶에 냐타난 일반적인 현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볼 때에, 종교개혁 이후 처음, 즉 17세기는 삭막한 교리중심시대였다. 그 후 18세기는 감정중심 신앙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둘 다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었으므로 기독교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에는 교리 설명을 경시하며 감정주의에 반대하는 다른 극단파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단지 의지의 활동 측면에서만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거룩하게 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요약해서 신앙에서 의지적 행함을 중요시하는 성경 구절들은 이외에도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기독교 신앙적 활동에 긍지를 느껴 열심히 행하며 교리주의나 신비주의를 과소평가하여 거들떠 보지도 않는 풍조가 일어났다.

 

이 추세에 박차를 가해준 것은 영국 기독교도들이 솔선했던 것으로 19세기의 기독교 분쟁에서 나타났던 잘 알려진 사실이다. 17세기의 빈틈없는 교리중심 신앙시대는 스위스, 프랑스 그리 고 네덜란드가 주축이었다. 그리고 18세기의 감정주의 신앙시대는 독일과 프랑스의 감정주의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영국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실제적 방식과 상업주의 정신 그리고 불굴의 의지력으로써 말이다.

 

선한 사업에 대한 이러한 열정은 영국에서 유럽대륙으로 전해졌으며, 이 의지 중심적 경향이 자선사업이나 선교활동에서 이루어 놓은 업적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을 탄생시키고, 신앙에 있어서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그것은 지성적 교리주의의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결과들과 감정적 신비주의의 연약하고 병적인 열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특징으로는 남에게 선을 베풀 마음가짐, 헌신, 힘찬 신앙 등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종교 개혁 당시 이후 그때까지 사라졌던 현상들인 것이다. 예리하게 의지 중심 신앙노선을 표명하며 그 주의를 극적으로 실천했던 구세군 교회에서는 불운한 사람들을 위해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그것은 심지어는 불신자 단체에서도 호응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편파적인 열심은 그만 유감스러운 결과를 자아 내고 말았다. 즉 의지에 치우친 신앙은 처음부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저버리고 선행으로 구원 얻는다는 오류를 범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게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옮겨져 인간 안으로 들어 왔다. 외부적 활동이 내적인 경건생활을 대신했다. 그리고 불신앙적 단체에서 많은 희생적 자선활동을 벌이자 선한 사업의 복음을 믿는 이들 활동파 신앙인들은 선행을 별로 하지 않는 기독교 신자들보다는 자신들과 같이 봉사에 뜻을 둔 불신자들에게 더 가까운 정을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이 의지적 복음 안에서는 실제적 종교심 즉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교제 추구가 점점 사라져 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섬세한 신앙심은 슬프게도 없어져 가고, 경건의 싹은 점점 더 흙에 파묻혀 버리게 되었다. 하나님과 은밀한 동행, 고요히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신앙은 설교와 또 일상생활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그러한 말은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행위들(deeds) 그리고 사실들(facts)만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선행들도 숫자적, 즉 양으로 평가하고, 그들의 호의에 대해서는 통계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리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거기에는 개종자들의 수, 조달된 금액, 사회의 구성원, 음식을 공급받은 굶주린 사람, 옷을 받아 입은 헐벗은 사람, 고침을 받은 병자들에 관해서 각각 기록해 놓은 보고서들이 있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보고서들이 실제보다 훌륭하게 보고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렇게 기독교가 행동만을 위주로 하고 영생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잊혀버린 책으로 짓밟혀지는 것을 볼 때에, 지성이나 느낌이 아니라 단지 의지를 통해서만 말미암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또 행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의지 위주 신앙자들이 열심히 행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지 못한 이유에 관해서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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