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31장 잔잔한 물가에서

새벽지기1 2021. 9. 4. 07:07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 한다면 의지에 관해서 훨씬 더 면밀히 다루어야만 한다. 의지가 작용하는 영역이 우리 조상들 시대에는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 문제 삼은 것은 과연 의지는 자유한 것이나, 아니면 구속적인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설교나 교리문답 공부서 조차도 그 이상으로는 인간 의지의 중요성이 취급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의지에 관한 영역은 개발되지 않은 채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 조상들, 즉 우리 이전 시대에는 의지롤 통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자라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의지는 책에 쓰여지거나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바에 의해 작용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의지를 움직여 선행을 하게 하는 분은 주님이신 것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두고 행하게 하시는 것이다(빌 2:13).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설교나 책에 얽매이시겠는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의 긍휼의 샘에서 나오는 생수로 원기를 회복할 정도로 은혜와 축복을 받고 경건한 일들에 관해서 깊이 묵상해 볼 시간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의지에 관한 영혼 능력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굴복치 않으므로 죄를 짓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한다. 이런 일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영혼을 시들게 해버리고 만다. 우리는 의지는 헤아려 알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속에 만들어 놓으신 것이며, 우리 속에 반영된 하나님 형상의 모습이 깊이 아로새겨진 것으로서,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맡기지 않고 인간적인 베일을 쓰고 있으면 결국 허점을 드러내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의지는 아주 힘있는 도구로써, 만일 사람이 분별 없이 그것을 사용하면 곧 그것으로 인해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는 또한 시대를 분별해야만 한다. 아동기와 또 잇따라 오는 청년기가 있는데 그때에 사람들은 본능에 따라서 살며 자신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말하자면, 앙금이 물에서 사라지는 때가 온다. 그때에 의식의 거울은 깨끗하게 되어 자선의 행동에 대해서 비쳐 보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우리 선조들의 세대보다 훨씬 더 진보 되었다. 전시대의 본능적인 삶이 점점 더 의식적인 삶으로 변화 되어 간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적용하지 못하면 뒤로 처지고 말게된다.

 

교회가 밝아진 의식의 요구에 발맞추어 통찰력을 가지고 과거를 돌이켜 보고 반성하는 대산에 옛것만을 고수할 때에 모든 교회는 스스로 힘을 잃어가게 된다. 그때에 교회는 현실을 타개하지 못하게 되며 교회에서 외쳐지는 설교는 삶을 동요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에 대처하지 못하게 된다. 교회는 신자들을 무장시키지 못하며 큰 영적 전쟁 가운데 기진맥진하게 되어 마침내는 씨움에서 기권하고 말게 된다.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고려하는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의지에 관한 연구를 동한히 한다면 그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겠는가?

 

이제 다시 우리의 본문으로 되돌아오자. 이 글의 목적은 우리 영혼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좀 더 가깝고 은밀한 교제를 하게 되는 데 있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 자체로 영생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감은 인간의 이해력보다는 의지를 통해서 더욱 잘 성취된다.

 

이것이 요점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아주 명백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사람은 마침내 그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는 의지를 갖게 된다. 이리하여 그의 의지는 자신을 용서해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용서란 그분이 실천해야 할 외적 규율이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하고자 하는 그분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며 이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는 하나님 존재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저절로 이와 같이 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의지 면에 있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처럼 특별한 점에서 여러분 가운데 실현된다. 그리고 이리하여 여러분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느끼면서, 여러분은 마음으로 습득한 지식이 아니라 여러분과 하나님 자신과의 밀접한 관계로 인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여러분은 이러한 지식의 아름다움, 친밀함 그리고 경건함을 알고 있는가? 모든 사람들은 생각하는 능력 또는 시간의 자유에 있어서 서로 같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점들에 대해서 깊이 또 예리하게 분석하며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우리는 후자를 어리석다고 말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리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조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은 그러한 능력이 부족하다.

 

자유로운 시간 역시 사람마다 다 다르다. 새벽에 집을 나가 밤에 지쳐 귀가하는 노동자가 성경을 공부하기 위하여 낼 수 있는 시간과 온종일 신학에만 열중하는 성직자 또는 신학교수의 연구 시간은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신학 공부를 하는 데는 예비 지식과 책들과 조용한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쟁기를 잡고 일하는 농부와 대학 교육을 받고 잘 갖추어진 서재에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는 목회자와의 차이는 상당한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주로 교육에서 찾고, 이렇게 얻어진 지석이 영생이라고 말한다면 너무나 비참하게 된다. 그렇다면 대부분 공부를 한 사람만이 영생을 얻게 되고, 목자는 양 무리 뒤에서 목적 없이 배회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여러분은 스스로 이렇게 될 수도 없고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만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영생이라면, 이 지식의 증가는 모든 사람이 이를 수 있는 모든 방법들, 즉 학자는 서재에서, 노동자는 그 일터에서, 가사에 쫓기는 주부들은 그의 가정에서 얻을 수 있는 방법들에 의해 성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의지의 중요성과 상대적으로 단순한 지식의 하찮음에 대해서 알게 된다. 많은 지성인들이 거의 함께 하나님 아는 지식 밖에서 서성대는 인상을 주는 반면에 근면하고 순박한 믿음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영생의 향기를 내뿜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여기에서 여러분은 생명 자체의 민감한 신경을 접촉한다. 의지는 모든 사람 속에서 작용한다. 의지는 매일 행동한다. 의지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과 더불어 활동하는 것이다. 의지의 활동, 행동, 능력 그리고 의지의 충동과 열정은 널리 퍼져 갈 것이다. 그러나 의지 없이는 아무런 활동, 행동,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아무런 경력도 존재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인간들 간의 모든 차이점들은 사라진다. 모든 사람은 매일 스스로 의지를 대한다. 사람이 외딴 곳에 있거나 평범한 위치에 있거냐 어디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의지는 그곳에서 활동한다. 의지 작용은 독립적인 것이거나 생명에 추가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모든 동맥에서 고동치는 영혼 자체의 강한 충동인 것이다. 잔잔한 물가에서, 이 의지의 행동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매일 조용히 계속될 것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매순간 그리고 모든 경우에 말이다. 의지 활동은 결코 쉬지 않으며 의지 선택, 의지 결정, 의지 행동의 새로 공급되는 물줄기는 영원히 조용하게 파문을 일으키며 계속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지 않고 점점 더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를 따르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 계속되는 의지 활동에 의해서 점점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성장하게 되어 마침내 영생의 더 풍성한 보물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학식의 유무나 빈부귀천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여러분이 신학을 연구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가 문제 되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순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치 느린 강물이 계속해서 조용히 홀러 가듯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날마다 그 의지 작용에 의해 풍부해 질 수 있다. 왕좌에 앉은 여왕이나 밭 뒤에 있는 머슴이나 서재에서 연구하는 교수나 베틀에 앉아 일하고 있는 사람등 누구를 막론하고 날마다 영생에서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잔잔한 물가에서처럼 조용하게 계속된다. 또한 가장 좋은 점은 일상생활 이외의 다른 특별한 시간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모든 지적인 훈련은 특별한 시간을 요구한다. 그것을 위해서 매일의 일과가 침해당하게 된다. 우리 대부분에 있어서 삶이란 결코 쉬지 않고 돌아가는 물레방아인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의지를 굴복시킴”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하찮다. 의지는 결코 생활 밖에서 작용하지 않고 반드시 그 안에서 한다. 여러분이 밭 뒤로 걸어가든지, 책상 뒤에 서 있든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든지 병자를 간호하든지 다 마찬가지이다. 그것 모두는 의지의 표현이며 활동인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지 않고 여러분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순용하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며 또 이 지식에 의해서 무사히 영생 안에서 성숙해 갈 수 있는 활동 과정인 것이다. 

 

출처 자기부인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