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33장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새벽지기1 2021. 9. 6. 07:18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자, 재능이 많은 자, 가장힘이 센 자라 할지라도 이 땅에 있는 인간과 우리 주 되신 하나님과의 차이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하는가!"라고 자포자기적으로 한탄한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다(욥 36:26).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했던 불안한 아테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올 위한 제단을 세웠다(행 17:23). 그들은 이미 위하여 제단이 세워진 많은 신들 외에 그들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신이 있으므로 그 신께 희생제를 드렸던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단은 하나의 제도, 견해를 나타낸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미네르바냐 주피터 신 앞에 경배하는 아테네 시민들이 신들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이면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신지식(新知識)에 대한 소문은 자아 기만에 근거한다. 무한한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질 수 없다. 진실로, 무한하신 어떤 분이나 아니면 적어도 무한한 물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격적이든지 사물이든지간에 우리 인간들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 남아지게 된다. 이 무한자를 위대한 ‘알지 못하는 신’으로 경배하라. 그 대상에게 여러분의 무지함을 고백하고 공공연하게 여러분 자신은 신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갖지 못하였음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거룩한 신비주의가 새롭게 여러분을 감동시켜 줄 것이다. 여러분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는 척 하지 말고, 자신들이 신에 관한 지식을 소개 받고 전수 받은 것처럼 드러내지 말라.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자아를 속이 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속적 성직자 정략(政略)의 비결인 것이다."

 

이것은 아테네 살던 소수 그룹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현재 가장 유능한 사람들,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불가지론자( 不可知論者)라고 자처한다. 그들의 목적과 의도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들은 더 이상 불신앙자들이 아니며 전혀 불경건한 자들이 아니고 오히려 가장 경건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려는 데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주 겸손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길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높은 위엄에 의해 우리 인간들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거두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아주 겸손하고 경건해 보일지 모르지만 지지하기 어려운 것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과 전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는 아데네에서의 바울의 선포는 이처럼 잘못된 사람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표준을 불변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 주셨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신자들어 세상에 알려줄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한 것 같지만 무식한 불가지론 자들 앞에서 우리는 담대하게 그리고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리스도의 말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라”를 강조한다. 그러나 또한 신지식에 대하여 과장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즉 어떤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망설임이나 조금의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높고 거룩하신 분,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허물 없이 이야기한다. 그들은 공중기도에서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의 부족을 드러내며 따라서 협오스러운 감정을 일으킨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존자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하신 분에 대한 인간의 추론과 그분에 대한 우리의 모든 담화는 단지 진리의 일부를 더듬거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실로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다. 그러나 우선 두려움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연후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자들이 승리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그 두려움을 타도하기 위한 사랑도 없으며 따라서 그 두 가지 사이에 어떤 싸옴도 없게 되며 또한 승리를 얻는 일 역시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어린 아이처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도 없다. 이 경우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경솔하게 아는 척하며 지혜로운 척 하지만 신앙의 향기를 내뿜지 못하고 오히려 중요한 신앙의 근원을 질식시켜 버리게 되고 만다.

 

이런 위험을 피하려면, 우리의 전(全) 내적 존재,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음 받았다는 점에서, 특히 우리 삶의 목적과 우리를 지으신 뜻에 연관하여 볼 때 하나님에 대한지식이 절대 필요하다. 우리 삶에 의지적 결단을 주지 못하는, 하나님에 관해 형식적으로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그 밑에 물이 흐르지 않는, 꽁꽁 언 얼음 표면이다.

 

사람의 의지 작용(willing)에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하나는 의지 작용 그 자체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을 행동으로 바꾸는 의지작용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의지를 실행으로 옮기는 방법을 알고 있는 두 번째 의지 작용에 내적 가치를 두는 경향을 띤다.

 

오늘날의 이러한 의지적 삶에는 대담하고 잔인한 면이 있다.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대담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의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의 표현이어야만 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것이다. 입센(Ibsen)과 같은 사람의 영향을 받아 의지력을 너무나 편향적으로 몰아간 나머지 이 시대의 많은 사람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모든 반대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오늘날의 불굴의 의지의 주인공들과 비교해 볼 때에도 사도바울과 같은 허약자는 초라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삶 가운데는 가끔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고 고백해야만 할 때가 있음을 안다고 솔직하게 진술한다. 이 솔직한 주장은 여러 세대를 거쳐 수치스러운 것으로 비난 받아 왔다 그 비난자들은 입술로는 경건한 체하면서 양심을 팔아먹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비난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러한 비난을 별 문제로 하고,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솔직한 표현이다. 우리의 이상은 늘 높은 곳에 있으며, 우리는 늘 그것에 도달해서 그것을 생활에 실천할 능력이 없음을 애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언급해 주는 것이다.

 

마음에는 의지작용이 있고도 마음의 의지를 우리 삶 가운데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이 의지작용은 대부분 자유롭다. 자신의 악한 경향을 억제하고 자신의 내적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순응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경건한 성품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 역시 우리 속에 있는 옛성품의 거스리는 것과 더불어 하는 싸움을 포함한다. 그때에 우리가 세속적 삶에서 물러나서 홀로 우리 마음을 충고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내적으로 승리를 하게 되며,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킴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얻게 된다.

 

그러나 좀 더 거창한 두 번째 싸움이 뒤따른다. 즉 이제 여러분은 세상, 정욕 그리고 악마와의 내적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이 싸움을 위해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 굽히지 않고 저항한다. 그러다가 여러분은 자신 속에는 이에 대처해 나갈 능력이 없음을 발견한다. 마침내 여러분은 자신들이 신성하고 솔직하게 하려고 마음먹었으며 또 지금도 하려고 소원하고 있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 

 

너무나도 자주 이러한 유혹이 오기 때문에 여러분은 내적 의지에 대한 모든 액운을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시험이 오면 쓰러지고 말진대 고상한 신앙 인격을 연마하며 경건한 목적들을 지향한다 한들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반문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물리쳐져야만 한다. 이것은 자아를 깎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며, 여러분을 거룩한 이상으로 이끌어 주는 중요한 신경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양심이 이 싸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수없이 패하게 되고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 내적 의지 작업은 바록 외부의 유혹에 의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주가치 있는 일이다. 이 의지작용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환기시켜 주고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제를 갖도록 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게 하며 여러분의 양심을 일깨워 주고 여러분의 이상이 빛나게 하며 그리함으로 여러분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도와주는 영혼의 순화작업인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마음속에 있는 의지가 행동으로 실천되어 결과적으로 삶의 일부분이 될 때에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때에 신앙적 도덕 능력이 발휘되고 이에 따라 영웅적 기질이 여러분 속에서 일깨워지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승리하시는 능력이 여러분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여러분 속에 있는 의지작용을 변화시킴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생기면 의지 실천이 지연된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 조차도 능력 많고 난관을 꿰뚫는 힘을 지닌 양심이 경이로운 일들을 일으킨다. 양심의 활동은 마침내 여러분의 목적을 달성시켜 주며,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소원만 하던 의지에서 벗어나 그분의 거룩한 즐거움을 위해 행하는 의지를 갖게 해 준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