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35장 내가 사랑한다

새벽지기1 2021. 9. 8. 07:07

한 젊은이가 자신이 선택한 아가씨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가 자신이 고른 청년에 대해서 느끼는 사랑이, 특히 첫 단계에서는 때때로 너무나 엄청나고 물불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에는 서로 눈을 멀게 할 만한 신비스러운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약혼한 남녀가 늘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별나게 신비한 사랑에 도취되는 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다. 여기서 고려하고자 하는 지나치고 열중케 하는 사랑이 그 안에 죄스럽거나 관능적인 경향, 또는 저속한 육감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지 말자. 여기서 언급하는 사랑의 황홀경은 단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며, 영혼과 육체 둘 다를 통해서 일어난다. 우리의 죄 많은 생활에서조차도 육체적 접촉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사랑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다. 

 

남녀가 서로 같이 성실함과 온정으로 이 황홀한 사랑에 빠지면 별문제가 없다. 그럴 경우 가장 가까운 친지들만이 그 비밀을 알게 된다. 반면 흔히 있는 일로 한 아가씨의 가슴에는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르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청년에게서 그 정도의 반응을 찾아 볼 수 없는 짝사랑인 경우는 아주 비참하게 세상에 드러나고 만다. 약혼하고 진지하게 사랑했던 아가씨가 요즈음 그의 약혼자에게서 부정한 면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자살함으로써 자기파멸에 이르렀다는 종류의 기사가 이곳 저곳의 신문에 안 실리는 날이 거의 없는 것이다. 이 사랑의 황홀경은 비정상적인 종류의 애정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도달한 사람을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의 영혼을 미치게는 아니한다 할지라도 그와 비슷한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두에서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물불을 못가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황홀경에 빠진 사람은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버거(Burger)는 그의 ‘‘레오노라(Leon ora)"에서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명백히 말한 바 있다. 즉 열렬한 사랑을 서로 주고 받거나 아니면 죽음에서 사랑을 발견하든가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라. 사랑의 황홀경에 빠져 본 경험이 있는 여성이라야 빼어나게 지체 높은 부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황홀경을 경험한 사람은 심지어 아주 이기주의적이기도 한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종종 몇 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열정이란 대게 평범한 아가씨를 압도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 전체를 다른 사람이 감싸주기를 거의 미칠 정도로 열렬히 사모하는 것이다. 열정이란 비상한 현상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음에서 용솟음치는 열정, 그것이 좌절될 때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재빨리 그리고 과단성 있게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은 인생의 한 표현으로,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된다. 

 

아가서는 그러한 사랑의 황홀경을 묘사해 놓았는데, 그 목적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위한 인간 영혼의 사랑의 모습을 약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쓴 아가서는 넓게 펼쳐 있는 성경의 화폭 위에 인상적인 색채로 사랑의 형상을 넓게 수 놓고 있다. 이 땅 위에서의 결혼생활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즉 하나님과 개인 영혼을 붙들어 매주는 끈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심지어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남편이라고 부르시는가 하면 자신이 의로 이스라엘과 약혼했다고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우상 숭배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은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 볼 때에 인간 영혼을 하나님께 매주는 영원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신약에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더 잘 적용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인 주님은 그의 몸된 교회의 신랑이라 일컬어진다. 그리고 그의 교회는 그를 간절히 사모하는 신부인 것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큰 계명을 말씀해 주실 때에, 그는 우리의 영혼과 감각을 영원하신 분께 향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인생에서 보여지는 황홀경을 묘사하는 말로 규정지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큰 매력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의 대상에 대해 알고 발견하고 즐기게 하고 그리함으로 그것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하는 사랑의 황홀경과 무엇이 다른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이 항상 중대한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영혼 사이의 가장 고차원적인 사랑을 예표로 보여 주신 때문이다. 이것은 이 감도가 예민한 사랑에 거룩하고 고상한 특징을 부여해 준다. 이것은 부부사랑이 조화 있고 고상하게 발전되어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행복을 창조하게 끔 해준다. 그런데 육욕적 사랑에서 부부애는 무섭게 황폐하고 부패하게 된다. 감수성이 예민한 인간의 마음은 평정을 잃고 영혼은 빗나가 반미치광이 상태에 이른다.

 

하나님과 피조물을 연결해 주는 더 거룩하신 사랑이 이 모든 것 뒤에서 밀고 재촉하신다. 그러나 결합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합치고 영혼과 육체를 떼어 놓으며 영혼의 평정을 깨뜨리고 이리하여 가장 좋고 거룩한 부부간의 사랑을 호색과 광포로 부패시키는 것은 오직 우리 육체의 죄된 성품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것은 구름에서 순백색으로 내려오다가 땅위의 불순물에 닿을때 더럽혀지고 마는 눈송이와 같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가끔 부부간의 사랑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어 성경에서 시편 116편은 내가 여호와를 사랑한다로 시작된다. 그러나 원어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히브리 성경에는 훨씬 흥미롭게도 단지 “내가 사랑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가 사랑 안에 있다”고 말해도 좋다. 그것은 열렬한 마음에서 사랑의 힘에 의해 들려오는 영혼의 소리이다. 그것은 불가항력적 방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영혼에서 내적인 활동이 활기를 띠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이제 그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정도로는 알려지지 않았던 만큼의 내적 활동에 의해 촉진된다. 그것은 이것이 바로 사랑이 었음을 알고 깨닫게 해 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황홀한 상태에서 외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라고.

 

이런 놀라운 내적 활동이 자신이 선택한 젊은이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아가씨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저항할 수 없는 맹활동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것이 아주 거룩한 방법으로 영혼을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리며 오로지 영원하신 하나님만 향하게 해 준다. 아가씨에게 있어서 그것은 단지 거룩한 사랑에 대한 희미한 복사에 불과하나 여기에서는 거룩한 사랑 자체인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완전하고 조화 있는 작업으로 품위 있게 연결시켜 줄 영원한 사랑은 이 땅 위에서 영혼으로 하여금 가능한 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한다.

 

그것은 상상적인 신비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의지적 활동에 의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교리의 분석을 통한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전율하며 사랑을 구하는 마음의 따뜻한 내적 감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을 가라앉혀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동경하는 것이며, 가능한 모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아주 큰 실망에 빠지게 되다가 마침내 지금은 참되시고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마음의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고서 그분을 영혼에 모셔 들이고 이 사랑 안에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랑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는 말에는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사실 모든 사람 중에 완전한 무신론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은 거룩하고 순수하고 고상한 것이다. 하나님 안에는 사랑할 가치 없는 것이 전혀 없고 모든 사람들은 그분이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고 올바르고 선한, 자신들의 이상을 발견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거나 정신적 애착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은 채, 자신들이 덕이나 정의를 사랑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나 그들의 영혼과 마음에 하나님은 존재하고 계시지 아니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갈구하는 사랑이 전혀 없는 것이다.

 

속에 애정이 없는 냉정하고 타산적이고 위선적인 세상의 사랑에 비하여, 성경은 부드러운 신앙심을 가진 영혼의 사랑의 고백을 언급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고 발견함으로 마침내 그분에 대한 최고의 따뜻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고 스스로 그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속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바쁘게 일한다. 그리고 모돈 발언은 하나님 한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사랑 안에는 신학 사상의 분석, 상상력, 의지의 힘이 우리에게 가져다줄수 없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 우리는 이 사랑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우리가 피조물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하나님과 친하게 알게 된다. 마침내 천국에 가서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벽은 허물어지고 우리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 안에 우리가 있으므로 가장 거룩한 사랑의 정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