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깊이가 없는 사람들은 사랑만큼 쉬운 일이 없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본래 자신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조금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데는 종종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은 사랑하려는 의지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이웃들이 종종 거의 냉정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명이라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 명 밖에 안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말씀하실 때에 형제 사랑에 대한 사랑의 부족보다는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내세우셨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잊어 버리는 것에 대해 계속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롬 3:10-18)에 시편 기자의 탄식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를 반복적으로 기록한 것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인간에게도 옮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은 이 사랑이 처음에는 보잘것 없다가 후에는 얼마나 강력하고, 보다 뜨거워지게 되는지 명확히 깨닫게 될 때가 있다. 건달들이나 범죄자들분만 아니라 교양 있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 틈에서 본성대로 성장해 온 한 사람을 잘 살펴보라.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동감 있는 사랑이 전혀 없다.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전혀 없는 것이다.
한동안 이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여졌으나 그러한 허울은 기만적인 것이다. 지난 세기 초, 우리 국민 하층 사회에는 신앙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며 모든 형태의 무신론주의를 멸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사람들은 경건하다고 인정받기를 바라고 불경건하게 취급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엄숙한 예식의 경우에는 여전히 주님의 이름이 상기되었다. 이와 마찬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은 이전보다 더 나빠진 것인가? 그것은 분명 그렇지 않다. 단지 사람들이 점점 더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전 시대의 사람들과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단지 차이점은 오늘날에는 불신앙이 대학 강좌와 교단에서 그리고 신문과 공식회의에서 점점 더 뻔뻔스럽게 외쳐진다는 것이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직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이 신성 모독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심각하게 항거해 보았는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광범위한 단체에서 모든 신앙은 내던져 지고 그와 더불어 오히려 자유 사상을 비방하는데 대한 분개가 일고 있다. 이것은 전혀 이 시대적인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영적 배교를 했었던 당시, 이스라엘에도 이와 똑같은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
확실한 증거로서, 여러분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대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사 57:11).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연구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사랑이 금처럼 반짝거리는 것들 가운데서 조차도 그 사랑은 단지 도금에 불과한 것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선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신앙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가장 어려운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란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많은 관심을 갖고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비가 베풀어지는 모든 곳에서 냐타난다. 이러한 사랑은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관대하고 거리껌 없이 베풀어진다. 이 시대에 이러한 자선행위가 매우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다.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자선행위는 그것을 통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행복하시다. 하나님에게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시다. 그분은 전혀 여러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끌어 올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동정적 사랑으로 행복하신 분인 하나님을 사랑한 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여기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이 개입된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느낌에서 솟아나는 사랑인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근원과 존재 자체 때문에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즉 여러분이 그분과 관계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제외하면 존재 가치가 없게 되고 여러분의 미래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마치 여러분이 독립적으로 자신 속에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도둑질의 죄를 짓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마차에서 빠진 바퀴가 스스로 굴러 가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독립적인 존재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향하여 그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풍자나 조롱보다 더 냐쁜 것이다. 이것은 불법적인 사랑으로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서지 못하도록 하며, 책망과 비난을 받을 만한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며 이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시는 자력(磁力) 이 발생할 때에 영혼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우리에게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고 늘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모든 것들을 멀리하고 배격함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자유롭게 회복시켜 주는 압력이며 경향인 것이다.
우선 우리는 기도에서 이것을 깨닫는다. 사도 바울은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고 말한다. 여러분이 기도하고자 하나 할 수 없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힌 것들이 있기 때문임을 안다. 그때 여러분은 우선 자신들의 생각, 경향, 지각들에서, 그리고 정신에서 그 가로막힌 모든 원인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되돌아오시고 교제를 회복하시며, 여러분은 기도를 할 수있게 된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에서 잠깐 경험하는 바로 이 일이 여러분의 삶 전체에 퍼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 여러분 마음속에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생각을 가지시고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인간 정신세계의 모든 내적 조직은 이 네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네 가지가 가끔 다른 이기적이거나 또는 세속적인 관심사에 휩쓸리게 된다. 그러면 그것들은 역반용을 일으킨다. 그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작용한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잘못으로부터 돌이켜서 마음, 목숨, 힘, 뜻 이 네 가지를 모두 방향을 바꾸어서 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희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희생이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소유물을 기꺼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절대로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 목숨, 뜻, 힘 등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마음, 목숨, 뜻, 그리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단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가져 온 것들을 그분께 도로 갖다 드린 것뿐이다. 하여튼 여러분이 그런 식으로 하면 여러분의 마음, 목숨, 뜻, 힘 네 가지가 모두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고 또한 그분을 섬기게 된다. 그때에 막힌 담은 무너지고 사랑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다. 그때에 여러분은 도적질한 것을 되돌려 주는 수줍음을 맛보게 된다. 자랑할 것은 전혀 없고 단지 용서받기 위해서 기도할 뿐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라고 한 것은 이것을 가리킨다. 사랑은 상징들을 사랑하는 온유하고 품위 있는 행동인 것이다. 그래서 연인들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이나, 선물로 받은 귀중한 장신구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습관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약혼을 하고 이 은밀한 사랑을 잠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일 없이 애인만을 진심으로 사랑하겠노라는 영원한 증표로서 이러한 상징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사람이 선택을 하여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며,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상징을 두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을 위한 마음을 굳게 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정절을 지키는가 살펴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가져다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물이며 따라서 우리가 속해 있는 그분께 헌신함에 있어서만 우리 존재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몰두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타산적인 자세가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사랑에 심취되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 마음속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내적으로 매혹되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이 땅에 사는 경건한 신자들 가운데서 조차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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