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30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감

새벽지기1 2021. 9. 3. 06:16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자연히 주님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나게 된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신앙은 완전히 정통주의이나 자신의 생활 태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자. 또 다른 사람은 자선의 생활에는 엄격하나 교리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자. 그러면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남을 놀라게 할 정도로 교리에 대해서 상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아는데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활동에서 구원을 추구하려고 하는 소위 행동파 기독 교인, 즉 실천적 기독교는 아주 올바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서 완전한 지식을 얻으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 중의 하나인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면,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실생활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영생은 내세에서 누리는 생명이 아니고 현재 누리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라. 영생은 저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물의 근원인 깊은 샘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영생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실제 행동들, 현실적 존재, 계획들과 행위들과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 안에 뜻이 있고 여러분의 행동들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여러분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분의 뜻을 행하는 데는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는 그 임자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사 1:3)고 말한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한다면 말은 그의 기수를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소가 그 임자를 알며 말이 기수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조금은 눈에 의해 조금은 귀에 의해 알지만 대부분 그것들을 부리는 방법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기수가 말 뒤에서 올라타므로 말이 타는 사람을 전혀 보지 못하고 기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 짐승이 말소리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을 때에, 완전히 길들여진 말은 곧 그의 주인을 알며, 안장 위에 올라탄 사람이 주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를 즉시 분별해 낸다. 말이 잘 길들여지면 주인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순응한다. 마침내는 그 기수와 혼연일체가 되어 전쟁터에 나가서 고삐를 늦추어 놓아도 주인의 뜻대로 행동하게 된다. 이와 같이 조심스럽게 훈련 받은 짐승은 그 주인에 관해서 너무나 잘 알게 되어 주인에게 살아서 복종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에 순용하는 삶을 살아온 하나님의 자녀는 그 의지의 힘만으로 본능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그에게 있어서 교리 문답서나 신조 따위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얻어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유일한 지식이라거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거나 그것이 완전한 통찰력을 준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별한 양상으로, 이것은 다른 어떤 것 즉 이해나 느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산지식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해 주라. 

 

하나님의 자녀 된 여러분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의무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겉으로만 억제하고 악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인의 용서는 차원이 훨씬 다른 것이다. 기독교인은 아무런 보복이 없는 정직한 용서를 해야만 한다. 마음속에 조금의 분노나 비통함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용서를 하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여러분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해준 원수까지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여러분을 저주한 자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그를 진실히 사랑해 주는 식의 용서를 해야만 한다.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말에 주의하라. 원수에게 당신 자신이 얼마나 관대한가를 보여 주고도 그렇게 함으로 그를 창피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말라. 여러분은 당신 자신처럼 그를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말이 거의 이해가 안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에 의하면 여러분은 자신들이 남을 용서해 준 정도만 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얼핏 이 말은 하나님의 용서의 차원이 우리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우리가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 같이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과 완전히 반대가 되는 생각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여러분은 감히 자신들이 여러분에게 빛진 자들에게 베풀어준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원수를 용서해 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가운데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해 주기 위한 감각능력과 의지를 받게 되고 그리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된다. 즉, 여러분을 용서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말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도 불구하고 계속 증오심을 품고 있으며, 이리하여 용서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치 않는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용서하시는가에 대해 명료하게 보여 주시는 특별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한 예화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 어떻게 행함과 진실한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게 하는 가 알게 된다.

 

동시에 여러분은 여기에서 또 다른 것을 깨닫게 된다.  "행위를 중시하는 실천적 복음"(practical Gospel of works)은 부수적인 어떤 일, 즉 일상생활 범주에 속하지 않는 어떤 일을 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것은 “기독교 사업” “기독교 활동"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말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직장 가족과 사회에 관련된 일상생활 이외의 활동들을 의미한다. 열성적인 선교활동, 기독교 교육사업 촉진, 가난한 자 구제, 병자와 눈먼 자들을 돌보는 일 등등이 이를테면 "기독교 사업”이라 불리는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부분적으로는 아주 올바른 것이다. 

 

기독교가 생명력과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면 이 모든 일들을 능히 감당하고 남게 된다.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밝히는 모든 일이 기독교에 속해 있다. 참되고 진실한 기독교는 일상생활에 감화를 끼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일들을 성취시킨다. 그런데 행위를 중시하는 실제적 복음이 크게 잘못한 점이 있다. 즉 그것은 장미 넝쿨이 타고 올라가는 뒷벽은 무너지거나 말거나 전혀 생각지 않고 장미만 잘자라면 된다고 생각한 점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함은 우리의 특별한 삶뿐만 아니라 평범한 삶을 총망라한 전체적인 삶가운데 이루어지게 된다. 평범한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특별한 활동들 중에서 얻는 것보다 더 고상하며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다. 

 

여러분의 개인적 삶, 소명, 업무, 가족 그리고 사회와 사람들과의 만남에 관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은 여러분이 결코 끝내 버리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평생 계속해 나갈 공부인 것이다.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굴복하며 가장 상세한 부분까지 철저히 순종하는 힘을 얻는 것은, 매일의 공부뿐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매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는다. 이렇게 매일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게 되고 또 그가 얻는 모든 영적 승리로 말미암아 그는 또한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된다. 그 지식이란 머리의 이해력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여러분이 점점 하나님과 같이 느끼게 되고 그분과 같이 생각하게 됨에 따라서 여러분은 점점 더 진실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잠깐동안만 자신의 뜻을 굽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담대하게 자신을 쳐 복종시켜 하나님께 굴복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기질이 변화되어 스스로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며 날마다 그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자신을 아는 지식이 늘어감과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게 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존재와 뜻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존재에 대한 유리처럼 맑은 표현인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은 그것 자체로 하나님 본질에 관한 지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존재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 자체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아무리 십계명을 암송하고 성경 전체에 나온 하나님의 뜻에 관한 모든 구절들을 찾아내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알았노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여러분이 그것을 문자적으로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 구절들의 참 뜻은 여러분의 개인적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속으로 들어감에 의해서만 깨달아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가 항로를 지나 안전한 항구에 도달하게끔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은 단지 항해술에 관한 책을 읽은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바다에 나가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가운데서도 배를 몰아 안전하게 항구에 돌아온 사람만이 배를 조종할 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은 암기로 학습하여 얻어 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여러분 자신의 의지 기관으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서 스스로 그것을 성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 "실천적"인 기독교를 마치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비난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기독교에는 그러한 실천적인 활동이 절대 필수적인 것이다. 단지 그 활동에 깊이만 더 첨가하면 된다.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모든 삶에 적용시켜야만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 지식의 단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것 자체로서 아무 부족이 없는, 부분적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다른 지식 즉 이해력 감정 그리고 상상력에 의해 얻어지는 그분에 관한 지식에 연관됨에 의해서만 온전한 전체가 되며, 영생인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는”것은 주로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순복함에 따라 얻어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라.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여러분에 관한 하나님의 뜻으로 그것은 여러분의 삶, 직업 그리고 삶의 운을 결정해 준다.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다른 것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들이 원해야 하는 방법과 자신들이 해야 하거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서도 저를 통해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그것(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복한다면 여러분으로 하여금 조금씩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 나게 해 주는 것온 두 번째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