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 423

128. 하나님의 형상_1

[기도/말씀]​​​ ​ 하나님 아버지, 충만한 영광을 하늘에 두시고, 넘치는 기쁨을 우리에게 내려주시며, 때마다 일마다 주의 긍휼과 은혜가 임하게 하소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고 고백한 다윗과 같이 하나님 임재와 기도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하소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골1:15) [배경/해석] ​ 예수는 누구신가? ​ 계속해서 묵상해야 할 기독론의 담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보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시도는 무모합니다. 이는 표적 중심의 신앙이 되어 건강하고,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적에서 신앙이 나오는 것이 아니..

죄의 잔재의 위험성!(창31:17-42)

죄의 잔재의 위험성!(창31:17-42) 본문은 야곱이 하란 거주 20년 만에 야곱이 처자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마침내 외삼촌 라반의 집을 탈출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 일행을 7일간 추격했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가족신(우상)인 드라빔을 야곱 가족을 수색했으나 라헬의 재치로 찾지 못했다. 당시 드라빔은 라반 가정의 가정 수호신이었다. 이 드라빔 사건은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 내에 우상 숭배의 잔재를 남겼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것이다. 그 우상의 잔재가 결국 바벨론 포로 시대(BC586년)까지도 잔존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것은 죄의 잔재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결국 죄의 종노릇 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야곱을 추격하는 라반에게 현몽하여 야곱을 해하지 못하도록..

기도와 마음으로 함께합니다.

새로운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날입니다. 늘 그러하듯 한 날들이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물하신 오늘입니다. 여전히 해는 뜨겠지만 분명 어제의 해는 아니겠지요. 오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이심이 신비요 감사입니다. 바로 그분께서 사랑하는 형제에게 오늘이라는 귀한 날을 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받은 검사의 결과를 보며 지금 겪고 있는 무거운 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께서 장차 어떻게 인도하실 지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오가는 길이 평안하길 소망합니다. 검사 결과를 판별하는 의사들을 지혜롭게 하시며 정확한 진단과 함께 최선의 치료방법을 찿아낼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진료 과정마다 비상 간섭하여 주실 줄 믿고 기..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22년 10월23일 수치 만약 시간 여행이 실제로 가능한 순간이 오면 저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로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다음은 구약의 문서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절입니다. 대략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까지 이어지는 시절입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자연재해도 대재난 급으로 발생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욜 2:25절에 따르면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곡물을 모두 먹어치운 일들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지금이야 흉년이 들면 곡물을 수입할 수 있으나 당시는 형편이 그렇지 못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엘 선지자는 23절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외쳤고, 앞서 21절과 22절에서도 두려워하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22년 10월23일 수치 만약 시간 여행이 실제로 가능한 순간이 오면 저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로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다음은 구약의 문서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절입니다. 대략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까지 이어지는 시절입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자연재해도 대재난 급으로 발생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욜 2:25절에 따르면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곡물을 모두 먹어치운 일들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지금이야 흉년이 들면 곡물을 수입할 수 있으나 당시는 형편이 그렇지 못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엘 선지자는 23절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외쳤고, 앞서 21절과 22절에서도 두려워하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이미 알려드린 대로, 오늘 예배 후에 ‘사역한마당’을 엽니다. ROC에 가시면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역에 대한 안내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행사를 위해 사역장과 사역부원들이 수고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교우들께서는 예배가 끝난 후에 ROC으로 가셔서 일곱 개의 스테이션을 모두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테이션마다 다양한 간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방문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각 사역의 내용을 알아보고 그 사역을 위해 수고하는 분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많은 교우들이 다양한 사역을 통해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누가 알아 주기를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알아 주고 격려해 주면 힘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참..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사도행전8:20-21)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내어 그곳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안수하며 기도할 때 성령을 받는 것을 본 시몬이라는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돈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시몬의 생각을 망할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의 능력의 현장에서 성령님의 실체를 본 사람들이라면 시몬과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신 분입니다. 성령님도, 성령님의 능..

두려움 (4)(막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40) 예수님은 침몰하는 배로 인해서 죽을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이렇게 구체적인 죽음과의 직면으로 당하게 될 두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잘 알고 계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믿음 운운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믿음을 단순히 우리의 심리작용이나 의지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이런 믿음은 모두 주관적인 차원입니다. 돌멩이를 대상으로 “믿습니다.”하고 외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믿음이 생기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

두려움 (3)(막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40)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뾰족한 방법은 없지만, 평소에 나름으로 준비를 한다면 극한 상황만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들리는 말로는 “죽음을 준비하는 모임”도 있다고 합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똑같이 통과해야만 할 죽음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겠지요. 저의 경우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우선 소극적인 것은 무(無)의 세계로 들어가는 연습입니다. 창조 이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고나 할까요? 또는 유(有)의 반대개념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무와 유의 경계선으로 들어가는 훈련이라고나 할까요? 여..

두려움 (2)(막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40) 십여 년 전쯤인가, 저와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던 후배 목사가 있었습니다. 성격도 좋고, 체격도 건장하고 잘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간암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6개월 시한부를 선고했습니다. 병문안을 갔더니 본인은 믿음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더군요. 신유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가족과 교회 식구들이 집중적으로 기도를 했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발버둥을 칠까요? 아니면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이런 건 실제로 당해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의미한 상상입니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암으로 죽어가면서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