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1 15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옵소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때를 주장하시고 좋은 계절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이 신비롭고 감사합니다. 그 은혜로 살아가는 나날 되게 하시옵소서!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하오니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께서 들으시고 속히 응답하여 주실 줄 믿고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나의 친구가 갑작스런 일로 고통 중에 있사온데 주님께서 비상 간섭하여 주시어 속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옵소서! 친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친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어 여기까지 인도하셨읍니다. 원하옵기는 이번 일 가운데 주님께서 친구의 마음 가운데 주님만이 주시는 평안을 주시고 다시 한번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오래 전에 친구와 ..

114. 위로부터 난 지혜

[기도/말씀]​​ ​ 아버지 하나님, 기도를 통하여 영혼이 강건해 지고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열정으로 달려가게 하옵소서. ​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3:17)​ [배경/해석] ​ 솔로몬의 지혜의 출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 '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왕상10:1)​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입니다. 지혜를 얻은 자에게 장수와 부귀도 더하여 주십니다. ​ '16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18 지혜는 ..

아브라함 후손들의 족보정리!(창25:1-18)

아브라함 후손들의 족보정리!(창25:1-18) 본문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계보와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해 기록이다. 전반부는 오늘 날 아랍 족속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의 후손의 계보이며, 중반부에서는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의 계보에 대한 기록이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죽음은 구속사의 무대에서 그 임무가 다 끝나고, 이제 이삭과 야곱에게로 옮겨갈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각 시대 마다 주역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교체됨은 필연적이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여자의 후손(창3:15)을 통한 인류 구원의 언약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11절은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언약이 이삭에게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본문이 아브라함의 후처와 첩의 소생에 관한 족보..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 (로마서 8:12~17)

예수님이 꿈꾸시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의 지난 37년 역사 속에 성령께서 이끄심을 경험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1992년 하용조 목사님이 성령사역을 선포하신 바로 그때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94년 하용조 목사님이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2천 선교사와 1만 사역자’ 비전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시 온누리교회는 1만 명의 사역자를 배출할 만큼의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성도가 수천 명 밖에 되지 않는 교회가 2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놀랍게도 2018년 온누리교회 누적 파송 선교사가 2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성령님의 이끄심에..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고후11: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고린도후서11:1)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얼마든지 자랑으로 들릴 수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 성경을 읽을 때 "바울은 어떻게 자신에 대해서 저렇게 미화시키고, 저렇게 자신만만하고, 저렇게 확신에 차 있는가 좀 덜 된 사람이 아니었을까"라고 시덥잖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주장한 것이 다분히 자랑으로 들려질 수 있고, 그것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라고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사람을 성경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용납하고, 지지해주고..

다윗의 마음과 요압의 책략 :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다(삼하 14:1-20)

"1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삼하 14:1-20) 압살롬이 그술 땅으로 피신한 후에 다윗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압살롬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선뜻 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데려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압살롬에게 있었습니다. 이때 책략가인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데려올 계책을 만들어 냅니다. 요압은 드고아의 여인을 불러서 다윗 앞에서 할 말을 알려줍니다. 드고아 여인은 매우 설득력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다윗 앞에서 꾸며낸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과부로서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율법을 근거로 남은 아들을 죽여서 씨를 말리려고 ..

제갈공명의 후회

제갈공명의 후회 “제갈공명도 죽으면서 ‘적을 너무 악랄하게 죽여 내가 천벌을 받게 되는구나’라고 후회하며 ‘적도 퇴로를 열어주며 몰아붙여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김홍석 저(著) 《명품인생》(한국문서선교회, 33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구약성경 나훔서는 고대 근동에서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국가였던 앗수르가 멸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앗수르는 적들의 피부를 벗겨 성벽에 바르고, 사람 머리통을 모아 기둥을 만들고, 얼굴과 신체의 일부를 자르고 내장과 식도를 꺼내서 길을 덮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한 행위를 하였습니다.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

성경을 읽는 특권을 누리십니까? (2022.10.11,화요일)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명기 17:19). 일반적으로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읽는 것이 신앙적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것은 의무라기보다는 엄청난 특권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귀족의 신분쯤 되는 사람들이나 비싼 양피지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사서 옆에 두고 읽을 수 있었으며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인 14세기까지만 해도 성경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누립니다. 아침에 신문을 읽을 때 그것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밤새 일어난 일들이 궁금해서 저절로, 마치 중..

마음은 믿을 만한가?(막 4: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막 4:18) 오늘 말씀도 이미 7절 묵상에서 한번 다룬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약간 곁길로 빠진다는 느낌이 든다하더라도 인간의 마음 자체에 대해서 생각을 나누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을까요, 아닐까요? 세상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세상 탓 하지 말고 바른 마음, 바른 신앙을 가지라고 설교하십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가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마음공부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먹는다고 나쁜 생각이 없어지고 좋은 생각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이..

말씀의 뿌리 (막 4: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막 4:17) 돌밭은 말씀의 뿌리가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모든 식물의 생명은 뿌리에서 나오는데 그게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줄기, 잎, 꽃 등, 모든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식물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뿌리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의 뿌리, 즉 말씀을 지탱시켜주는 토대는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열심 있는 기도, 묵상, 예배 등, 일반적인 신앙생활을 말씀의 뿌리라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말씀의 뿌리가 따로 있는 건 아니겠지요. 식물에서도 줄기와 뿌리의 구분은 표면적인 것이고 전체로서는 하나입니다. 이런 점에서 말씀의 존재론적 깊이를 말씀의 뿌리고 할 수는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