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 (로마서 8:12~17)

새벽지기1 2022. 10. 11. 07:15
예수님이 꿈꾸시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의 지난 37년 역사 속에 성령께서 이끄심을 경험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1992년 하용조 목사님이 성령사역을 선포하신 바로 그때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94년 하용조 목사님이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2천 선교사와 1만 사역자’ 비전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시 온누리교회는 1만 명의 사역자를 배출할 만큼의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성도가 수천 명 밖에 되지 않는 교회가 2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놀랍게도 2018년 온누리교회 누적 파송 선교사가 2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성령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며 선포했을 때 이루어짐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2003년 사도행전적 교회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멀티사이트 교회를 선포하며 ‘Acts29비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때도 성령께서 온누리교회를 이끌어 가심에 하용조 목사님이 순종하시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중요한 순간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과 상상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오류를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는 없습니까?”라고 염려합니다. 이 질문에 주어지는 대부분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광신적인 신앙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과 전통으로만 해석해서 문자주의나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흘러가는 것도 광신적인 신앙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말씀이나 말씀이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없는 말씀이 존재할 수 없고, 말씀 없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과 성령이 조화된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어느 해 교회 표어를 ‘말씀과 성령’으로 정하셨는데, 그것은 ‘교회가 말씀과 성령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온누리교회는 말씀과 성령이 조화된 교회를 추구합니다. 성령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는 말씀에 인도함을 받는 교회를 추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인간의 잘못된 생각, 자신의 상상, 욕심을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착각하는 오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걸어온 교회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지만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모두 이와 같다”(요 3:8).      
‘바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와 ‘영’이라는 단어가 동일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바람으로 번역하고, 어떤 때는 영으로 번역합니다. 왜 바람과 영을 같은 단어로 사용했을까요? 영의 생명력 있는 역사를 바람이 잘 보여주기 때문 아닐까요? 오순절 성령님이 강림하셨을 때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람 같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누구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바다를 건너는 바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과학이 발전한 이 시대에도 바람의 흐름을 따라갈 뿐이지 바람을 일으킬 수 없고, 그 바람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대비할 뿐입니다. 바람이 아무렇게나 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예측하지 못하는 어떤 법칙이나 근거를 따라서 움직입니다. 바람은 때로 피해를 주기도 하고, 바다를 정화하기도 합니다. 또 바람은 시원함을 줄 뿐만 아니라 많은 배들을 움직이게 하고, 많은 꽃들이 피어나도록 씨앗을 날려줍니다. 밭의 이삭을 여물게 하고, 솔방울을 굵게 만듭니다. 바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설명해 주기에 예수님이 바람으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아무렇게나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성령님이 바람처럼 이루십니다. 우리가 언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리에 있거나 행하는 통로가 되기로 결단한다면 성령님이 바람처럼 우리를 사용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통로 역할을 하는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바람처럼 움직이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온 교회입니다. 이제 또다시 우리가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동체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대한 설교를 할 때마다 제가 여러 번 인용한 문장이 있습니다. 어윈 맥머너스가 쓴 <교회론> 책 가운데 제가 늘 마음에 두고 있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문장이 있습니다.    
“문화가 변해감에 따라 교회가 운동이 아니라 기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기관은 문화를 보존하지만, 운동은 문화를 창조한다. 사라질 문화를 보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문화의 수치스런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당신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의 모든 것이 성령의 사역에 뿌리를 두고 생성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바람과 같이 움직이며 그가 한때 불었던 곳을 침묵 속에 남겨두고 지금 새롭게 움직임을 일으키는 곳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돛을 올려서 성령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교회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운동력입니다. 교회가 기관화되어갈 때 문화를 보존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어떤 제도나 문화를 보존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데 있습니다. 온누리교회 역사 속에 성령님의 역사로 형성된 문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누리교회 문화를 지키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 우리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미래를 움직이는 앞선 문화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람처럼 움직이시는 성령님과 함께 움직이며 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미래 세대를 이끌어갈 줄로 믿습니다. 돛을 올려 성령님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 죽이는 훈련공동체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교회의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훈련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하는 육신에 빚진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12~13절).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교회의 양육이 추구하는 중요한 목적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는 몸의 행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우리 옛 자아의 영향력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옛 습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옛 성품의 잔재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이지만, 여전히 못 박히지 않은 것처럼 속이고, 몸에 남아 있는 옛 성품들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그런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몸의 행실이란 꼭 우리의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고방식, 마음의 습관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들이지만, 계속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육신의 영역에서 성령의 영역으로 옮겨간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합의나 정관, 회비 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얼마나 죽이느냐에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달려있습니다. 교회가 함께 나누는 모든 양육의 목표는 훈련입니다. 교회의 모든 양육은 곧 훈련입니다. 훈련의 목표는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 체육관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더 건강하고 강건하게 하려고 훈련하듯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훈련하는 영적 체육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훈련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해 악한 습관들을 끊어내고, 거룩한 습관들을 형성함으로 죄의 힘이 더는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자기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려 노력했던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수도원적인 흐름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교류를 끊고, 수도원에 들어와 몸의 행실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종교개혁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온갖 철저한 규칙을 만들어 지킴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입니다. 고된 규칙을 지키며 고행을 하는 것이 곧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종교생활을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의미로 청도교들은 ‘mortification’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고, 킹 제임스 버전은 이것을 사용해 ‘죄 죽이기’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능력으로 죄로 향했던 마음의 동기가 바뀌는 것입니다. 죄로 향했던 마음이 더는 향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재미없고 불쾌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죄로 물든 습관으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서서 이제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죄를 멀리하게 되는 것을 ‘죄 죽이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양육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큐티하고, 일대일제자양육하고, 여러 영적 훈련을 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도록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양육의 목표는 훈련입니다. 교회는 훈련공동체, 영적 체육관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양육과정에 성실하게 기쁨으로 참여하십시오.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는 것 이상으로 영적 양육과정에 열심히 참여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더 잘 받는 성도와 교회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친밀함을 누리는 가족공동체
둘째, 아버지와 친밀함을 누리는 가족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에 이르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영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성령은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합니다”(15~16절). 
우리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바’는 친밀함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축복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의 가족공동체입니다. 자녀 됨 축복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는 친밀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 친밀함이 없는 사람은 대인관계에서도 친밀함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어른들을 통해서 아바 아버지와 친밀함을 누리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함께 삶을 나누는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친밀함을 배워야합니다. 친밀함은 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정보와 지식의 목적은 친밀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없고, 관계가 없으면 친밀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도들과의 관계가 없습니다. 홀로 신앙생활 하셨던 분들은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혼자 절대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결혼이요,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 믿는 것입니다. 순예배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다른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며,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삶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나도 모르게 친밀함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순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친밀함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 늦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고집을 내려놓고 순에 참여하십시오. 그리고 삶을 나누십시오. 여러분과 교제를 나누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친밀함을 경험하는 가족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선교공동체
셋째,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선교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그분과 더불어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됩니다”(17절). 
이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아니라 십자가 은혜를 전하기 위해 필요한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영광스러운 고난이며, 하나님 나라의 모든 유업을 함께 상속받는 고난입니다. 온누리교회는 선교공동체로 성장해 왔습니다. 온누리교회만이 아니라 여러 선교단체, 문서선교 두란노서원, 미디어선교 CGNTV, NGO선교 더멋진세상, 전방개척선교 두란노해외선교회(TIM), 학원선교 한동대학교, 말씀 전하는 선교회 성경연장교육(BEE), 이 밖에도 다양한 형태의 선교단체, 가정회복운동의 아버지학교 등이 온누리교회 안팎에 존재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기 위한 고난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두란노해외선교회(TIM)가 창립된 배경에 온누리교회 한 장로님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최선수 장로님이십니다. 최선수 장로님은 치과의사로 강남에서 번창했던 병원을 운영하셨던 분입니다. 강남의 좋은 저택과 경기도 광주의 4만 평 농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중국 선교사로 가셨습니다. 최선수 장로님이 두란노해외선교회(TIM) 1호 선교사님이 되셨습니다. 지금은 120년 전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 182명의 자료를 정리해서 역사관을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최선수 선교사님의 <선교는 나의 축복이었다>라는 책 후반부에 자신의 생애 후반부를 하나님께 드린 것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어렵지만 신나고 기쁜 일이었다.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는 삶이었다.” 
최선수 장로님이 선교에 헌신한 영성이 지금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온누리교회의 영성이고, 두란노해외선교회(TIM)의 출발이었습니다. 
또 기억하고 싶은 분은 김사무엘 목사님이십니다. 김사무엘 목사님은 예수님을 모르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1972년 백만장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도미하셨습니다. LA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1977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곧바로 선교사로 헌신해 일본에서 교회 6개를 개척하셨습니다. 교회가 안정되고 성장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중국과 북한사역을 준비하던 중에 하용조 목사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때 하용조 목사님이 2천/1만 비전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선교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김사무엘 목사님이 온누리교회 선교 책임자로서 두란노해외선교회(TIM)와 세계선교센터 등을 이끌며 온누리교회가 2천/1만 비전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동역자가 되셨습니다. 온누리교회 선교의 틀을 잡아주신 분입니다. 그러던 중에 전쟁으로 이라크가 무너져가고 있을 때 ‘바로 이때에 교회가 개척되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이라크에 가셨습니다. 그때 지금 안산M센터를 섬기는 노규석 목사와 아부다비온누리교회를 섬기는 김도균 목사가 청년 때 유서를 쓰고, 김사무엘 목사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김사무엘 목사님이 이라크에서 급성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이라크에 가지 않았더라면 병을 얻지 않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당시 이라크 여러 곳에서 급성 백혈병 환자들이 발생한다는 뉴스들이 있었습니다. 급성 백혈병을 얻고 3개월 치료를 받으시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또 한국에서 이라크로, 마지막 여정을 이라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분들이 온누리교회 역사 속에 계셨기에 하나님이 온누리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귀한공동체를 이루고, 예배공동체, 성령공동체, 선교공동체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2002년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90% 이상이 붕괴됐을 때 건강도 정말 안 좋으신 분이 그 땅에 가봐야겠다고 하셔서 몇 사람이 갔습니다. 폐허 속에 노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아프간 관료들을 초청해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뒷받침을 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온누리교회가 몸집이 커진 대형교회로 존재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상급이 없었을 것입니다. 감동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때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2천 명 선교사의 비전, 미디어 선교의 사명, 전방개척선교의 사명 등이 주어질 때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헌신해 왔던 온누리교회 역사의 발걸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훈련공동체,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누리는 가족공동체,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선교 공동체로 다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