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족함이 아니라 결핍함에서,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과 절망 속에서,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순종으로 감사하십시오.”
교회가 감사를 절기로 지키기로 한 것은 영적 생활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완성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영적 태도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감사하셨는지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감사 생활을 새롭게 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우리에 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감사하셨다는 기록들이 복음서 여러 군데 나오는데, 개정번역을 비롯한 여러 번역서가 ‘ 감사’ 를 ‘ 축사’ 로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분명히 ‘ 감사하다’ 라는 단어인데 왜 이것을 ‘ 축사’ 라고 번역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말성경에서 ‘ 감사’ 라고 번역한 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이고, 또 예수님의 감사를 우리가 묵상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됩니다. 오늘은 세 가지 중요한 사건에서 예수님의 감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기 전에 감사
첫째,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기 전에 감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씩 나눠 주셨습니다. 물고기를 가지고도 똑같이 하셨습니다”(요 6:11).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감사하셨습니다. 떡을 가지고 감사하셨고, 물고기를 가지고 감사하셨습니다. 그 떡과 물고기는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였던 빌립이 “이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부족합니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오병이어로는 오천 명을 먹이기에 너무 부족한 상태였습니 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먼저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 축사하신 후’ 라고 번역하니까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 축사하신 것으로 해석하는데, ‘ 감사’ 로 번역하면 결핍된 상황 자체에서 감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감사는 결핍의 상태에서 드려진 감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적이 일어난 이후 풍족한 상태에서 드려진 감사 가 아닙니다. 기적 이전에 부족함과 결핍의 상태에서, 수천 명을 먹이기에 너무 부족한 오병이어를 가지고 감사하셨습니다. 풍성해 졌을 때 드리는 감사는 늦은 감사입니다. 결핍할 때, 이른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상황과 자원을 비교해서 위축되거나 한탄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은 ‘ 이것으로 누구를 먹일 것인가? 한 소년의 음식으로 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라며 상황과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비교했지만, 예수님은 상황과 비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함과 상황을 비교했습니다. ‘ 오병이어’ 라는 적은 가능성이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어떤 은혜가 있을지를 바라보며 감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서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질 것을 기대하고 감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돌려질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이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 왕으로 삼고자’ 따라다녔습니다. ‘ 이런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면 우리가 일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겠다’ 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시고, 그들을 피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보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군중들이 찾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배부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배부름을 추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모든 상황이 결핍과 부족함과 굶주림 속에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작은 것을 가지고 나갈 때도 풍족한 것으로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결핍과 부족함의 상태에 있다면 바로 그때가 감사할 때입니다. 감사는 결핍을 풍성함으로 바꾸는 기적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존 클레릭이라는 미국 LA주의 대법원 판사가 2007년 변호사로 일할 때 재정적으로 완전히 파산했다고 합니다. 깊은 계곡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 문득 어떤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 할 줄 알기 전까지는 네가 원하는 것들을 얻지 못할 것이다.” 누구의 음성인지는 모릅니다. 아마 성령님의 음성이었을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손주들이 감사편지를 한 장씩 쓸 때마다 1달러를 더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변호사로 일하면서 받았던 여러 편지에 감사편지를 쓰고 끝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는 매일매일 감사편지를 썼습니다. 전혀 감사할 이유가 없었던 사람에게도 감사 거리를 찾아서 썼습니다. 사무실 청소를 도와 줬던 분을 비롯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에게 감사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지금 상황이 불행해 보이고 부 족해 보이고 결핍된 상황이고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처럼 보였지만, 자신의 현재 상태가 불행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소중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난 이후 자신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가 변화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인생이 이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변화와 기적을 경험했고, 그의 변화된 삶으로 인해 주변이 변화되고, 결국 모든 상황이 변화되는 기적을 경험 했습니다.
여러분, 결핍과 부족한 상태가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때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풍성한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부족한 상황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
둘째,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말을 들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요 11:41). ‘ 돌을 옮겨 놓은 것’ 은 이제 나사로를 나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령하시기 이전입니다. 나사로의 가족들은 여전히 슬픔과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원수의 무덤이 아닙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제자공동체의 일원이요, 예수님을 섬기는 가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니실 때마다 이 가정에 머무셨고, 이 가정의 공궤를 받으셨고, 제자들이 그 가정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께도 깊은 슬픔을 주었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드려진 감사입니다. 절망적인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감사가 아닙니다. 절망의 상황을 직면하는 태도가 감사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감사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드려진 감사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이 중국에서 한참 열매 맺으며 사역하는 동안 어려운 기후와 환경에서 8살 큰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을 장사지낸 뒤 남은 세 아들과 어린 딸의 건강 또한 어렵다는 것을 알고 급히 영국으로 보내려고 배를 탔습니다. 상하이로 가는 여정에서 5살 된 막내아들이 점점 아프더니 세상을 떠났습니다. 양쯔강 인근 공동 묘지에 막내아들을 묻고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허드슨 테일러가 동역자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저는 오늘 사랑하는 아이들과 중국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두 아이에 대해서는 이제 근심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의 품 안에서 쉬고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저의 눈물이 그칠 줄 모르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저에게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 일부를 맡겨주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역에 뛰어든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두 자녀를 선교지에서 질병으로 먼저 떠나보낸 절망과 슬픔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감사입니다. 두 자녀와 이별한 슬픔이 중국 선교를 위축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의 아내가 새 생명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영양 결핍으로 출생하는 아이와 함께 3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테일러 부인이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그때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테일러 부인은 주님의 영원한 팔에 안겼습니다. 저는 이러한 장면을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테일러 부인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무릎을 꿇고 그녀를 주님의 팔에 의탁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12년 반 동안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했고, 영원하신 주님께서 데려가심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남은 생을 주님을 위해 더 헌신하기로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장면을 관찰한 분의 기록입니다. 테일러 선교사는 아내를 떠나 보낸 이후 동역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제가 맞이한 슬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아내를 슬픔과 고통 없이 데려가셨기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의 눈물은 슬픔이기보다 기쁨의 눈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 그분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심에 감사합니다.” 그의 모든 언어는 감사로 끝이 납니다. 아내의 죽음과 자녀들의 죽음 앞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는 모습이 바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셔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능력을 베풀기 전에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슬픔과 절망 한복판에서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감사의 모범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소생케 하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시기에 감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과 절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신뢰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에 슬픔과 절망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슬픔과 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그 절망 가운데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테일러 선교사님처럼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시간은 기쁨과 승리만이 아닙니다. 슬픔과 절망의 때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저는 여러 기관에서 섬기는 직책을 맡았는데, 과거 잘못된 일들을 해오던 기관에도 들어가서 그곳을 다시 바꾸고, 회복시키고, 정의의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분이 저를 고소했습니다. 생애 처음 고소를 당했습니다. 너무 황당하고 억울하고 힘든 상황에서 떠올린 것이 ‘ 이때가 감사헌금을 내야 할 때구나’ 였습니다. 그리고 생애 큰 감사헌금을 냈습니다. 생애 첫 고소 기념 감사였습니다. 마음에 가장 충격이 되었던 그때 감사헌금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일은 잘 처리를 했습니다. 답변 할 필요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무혐의 처리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때로 뜻하지 않게 겪는 억울한 일, 슬픈 일,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절망하는 바로 그때가 감사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며 절망하는 이들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나사로가 나올 것을 예수님이 아셨기에 감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감사하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기적이 일어난 이후 “하나님 기적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나사로가 나온 다음 “나사로가 나오게 하심에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적과 성공이 일어난 이후에야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 이전에, 회복 이전에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미리 감사하셨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먼저하는 감사요, 미리하는 감사입니다. 상황이 개선되고, 회복되고, 해결된 이후의 감사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 감사
셋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 감사하셨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예수께서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 이것을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잔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 받아 마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다’”(22~24절).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성만찬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게 하는 만찬이기에 ‘ 성만찬’ 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잔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겨지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우리 몸이 부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빵과 잔을 나누기 전에 감사하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전에, 나사로가 소생케 되기 이전에, 떡과 잔을 나누는 가운데 감사하셨다는 것은 자신의 순종의 죽음 앞에서 감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감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죽음 앞에서 드려진 감사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짐을 감사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을 감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하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의 끝이 희생이고 죽음이라면 감사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주로 하나님께 무엇인가 받았을 때 드리는 감사 아닙니까? 예수님의 감사는 자신을 죽음의 제물로, 대속제물로, 화목제물로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절정입니다. 드리며, 순종함으로, 죽음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마가복음 14장 26절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하시고 올리브산에 오르시면서 찬송을 부르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산으로 향했습니다”(26절).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이 찬송을 부르셨다는 딱 한 구절입니다. 물론 이 때만 찬송을 부르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이 중요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셨다는 기록을 왜 했을까요? 이제 십자가로 나아가는 여정, 올리브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유다의 배신이 이루어지고, 불법적인 재판이 이루어지고, 끌려가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바로 그 여정의 출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감사의 찬송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로 나아가는 여정에 대한 감사, 자신의 순종의 죽음을 감사하는 찬송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언제나 믿음의 감사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감사였습니다. 2010년 11월 21일 하용조 목사님의 추수감사주일 설교의 내용을 인용합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입니 다. 그때는 병원에서 하용조 목사님이 투석으로 인해 혈관이 너무 약해졌기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는 통고가 주어진 직후입니다. 그때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저는 간암 수술을 일곱 번 했고, 투석도 계속 받아야 합니다. 가끔 강단에 올라올 때 비틀거리며 올라옵니다. 저는 그래도 설교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그것이 저의 감사입니 다. 아픈 것도 감사하고, 죽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감사하려고 하면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망하는 것도 감사하고, 부도난 것도 감사하고, 불치병에 걸린 것도 감사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복으로 바꿔 주십니다. 은혜로 바꿔 주십니다. 감사는 축복을 낳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만나도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하용조 목사님의 고백적 설교였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예수님의 감사에서 우리가 중요한 원리를 배웁니다. 풍족함이 아니라 결핍함에서,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과 절망 속에서,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순종으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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