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은 로마서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독일의 루터파 경건주의자 필립 슈패너는 “로마서가 바울의 전체 서신중에서 보석과 같다면, 8장은 보석 중에 진주와 같다”고 언급했습니다. 유명한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예수 나의 기쁨’이라는 칸타타를 오늘 본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구원의 안전함과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시작해서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로 끝납니다.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선언으로 끝이 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1절은 “아무것도 없다”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정죄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39절도 ‘없습니다’라는 단어를 강조합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고, 결코 끊을 수 없다는 그 사이에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성도들의 구원이 단순한 소원이나 소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 온전한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이 확신은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성도의 탄식과 대조를 이룹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죄 아래 탄식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 나는 비참합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것입니까?”라는 탄식은 바울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옛 자아의 영향력과 옛사람의 끊임없는 공격 속에 있는 거룩한 성도들의 탄식입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탄식이 로마서 8장에 이르러 확신으로 나아갑니다. 7장에서 나타난 성도의 거룩한 탄식이 8장에서 성도의 영원한 안전이 됩니다. 이것을 시편 23편에 대입해 보면 7장에 나타난 성도의 거룩한 탄식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습니다. 로마서 8장의 성도의 영원한 안전은 시편 23편의 마지막 구절인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는 구절에 대입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성도의 거룩한 탄식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면, 로마서 8장에서 성도의 영원한 안전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안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별명을 붙인다면 ‘성령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나 다른 로마서에는 성령의 은사를 중심으로 설명했고,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했다면, 로마서 8장에서는 성도들을 위해서 성령님이 직접 행하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암송을 많이 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이 행하신 일들을 요약하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키신다”(2절), “율법의 요구를 이루도록 도우신다”(4절), “육신의 행실,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도우신다”(12절),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이 상속자임을 증언하신다”(16절), “성도의 연약한 기도를 도우신다”(26절), “성도가 영화롭게 될 것을 보증하신다”(30절)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성도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것을 증언하시고, 확신하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과 11절이 그 출발이 되는 진리를 말씀합니다. 그 진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했기 때문입니다”(1~2절).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으로 죄 없는 자로 여겨지는 ‘칭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첫째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정죄가 취소되고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과 6장에서 말씀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입니다. 그 대상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해서 옛사람이 함께 못 박힘을 경험하고, 그분의 부활과 연합해 부활 생명이 있는 자, 믿음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순종하고, 기쁨과 확신이 없습니다. 죄의식에 빠져 죄책감으로 봉사합니다. 두려워서 섬기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생활, 율법적인 생활, 나아가 종교가 중독되는 것은 1절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은 복음입니다. 이 말씀에 “아멘”이 나와야 그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은 로마서 7장까지의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로마서 8장부터의 말씀은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정죄 받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욱 적극적입니다. 구원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죽음의 법’이라는 말씀에서 ‘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와 방식을 의미합니다. ‘영향력’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어 이제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다는 것을 체험하려면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는 삶을 체험해야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성령님이 생명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근거가 되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근거가 되셨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죽음을 통과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나눠 주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의 원리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했습니다. 죄와 율법의 굴레에 사로잡혀 죽음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인해 연약해져서 할 수 없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량해 주시려고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 안에서 죄를 심판하셨습니다”(3절).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그 아들 안에서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던 죄와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죄가 있는데 눈감아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인데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심판을 받은 자이기에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은 노예 생활하던 히브리 민족이 의기투합해서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고, 그들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민족의 승리와 쟁취를 이룬 역사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보여주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바로가 그의 백성들을 내어주지 않았을 때 열 차례 재앙이 있었고, 그 마지막 재앙은 애굽에 처음 난 것을 모두 죽이는 심판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처음 난 것이 아니라 애굽 땅에서 처음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든 어떤 민족이든 애굽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가정에 처음 난 것은 죽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좌우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면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도 이 약속을 믿지 않고 참여하지 않으면 재앙이 임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더라도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애굽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도 이 약속을 듣고 따른 자들은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그 증거가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개역개정에서는 ‘수많은 잡족’이라고 표현했습니다(출 12:38). 그 단어를 나중에는 ‘다른 종족들’, ‘다른 여러 민족들’로 바꾸었습니다. 모세의 아내가 다른 민족 아닙니까?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된 민족이었지만 다른 민족들도 있었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 역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모형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그 집에 있음을 보고 죽음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된 것입니다. 피는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을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고, 그 제물이 그 집의 장자에게 심판이 집행된 것으로 여기고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그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의 심판을 이미 완전히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것이 로마서 7장까지의 메시지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었지만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집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복음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단순한 진리, 모두 들어서 아는 진리라고 여겨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언젠가 들었지만 팽개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집행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자유롭게 되었다”는 단순한 복음의 소식을 가슴 깊이 새기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종교생활을 하고, 율법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어떻게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나의 죄에 대한 심판이 집행되었기에 나는 정죄함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을 믿는 것에서부터 자유가 출발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것처럼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애굽으로부터 나온 것, 정죄 받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자유
우리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절 이하에서는 육신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대조합니다.
“이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4절).
‘율법의 요구’란 율법의 의로운 요구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의로운 요구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육신’은 우리 몸이 아니라 타락한 옛 자아의 영향력, 옛사람에게 남아있는 흔적들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성도가 거룩한 탄식을 하게 만든 살아있는 육신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은 끝까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합니다. 그 모습이 로마서 7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식에서 머무는 인생이 아니라 확신에 이르는 인생을 살도록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는 성령을 따라 사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절 이하에서는 육신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대조합니다.
“이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4절).
‘율법의 요구’란 율법의 의로운 요구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의로운 요구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육신’은 우리 몸이 아니라 타락한 옛 자아의 영향력, 옛사람에게 남아있는 흔적들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성도가 거룩한 탄식을 하게 만든 살아있는 육신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은 끝까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합니다. 그 모습이 로마서 7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식에서 머무는 인생이 아니라 확신에 이르는 인생을 살도록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는 성령을 따라 사는 자유입니다.
여러분, 여행을 갔을 때 유능한 가이드를 따라가는 것이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따라가는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자유입니다. 육신을 따라 가면 자유가 아니라 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고, 출애굽은 했지만 여전히 광야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의 습관, 사고방식, 탐욕에 묶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광야를 지나며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으로 인도받습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생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정반대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성령의 일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육신은 죄와 죽음의 법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법은 강력한 영향력입니다. 마치 중력의 법칙과 같습니다. 어떤 원리에 적용을 받습니다. 지구 중심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서 떨어집니다. 그런데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하늘을 나는 새가 있고, 비행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공기 역학의 법칙을 이용하면 계속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와 죽음의 법을 따라 움직이는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자유의 길인 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영원에 속한 것을 갈망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는가?’ 등 자신의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늘 평안이 있습니다.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6절). 정죄 받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평안입니다.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고, 모든 염려와 불안을 내어 쫓고 평안합니다.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도 평안합니다.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자기만을 알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요동치는 세상 한복판에서도 평안합니다. 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하늘이 진동하고, 요동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관계에 서 있지 않은 사람은 두려워 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언젠가 이 지구는 무너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하늘이 진동하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흔드는 때가 올 것입니다. 불태우시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도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평안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유
“그러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몸은 죄로 인해 죽으나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자기 영으로 인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10~11절).
10절은 현재 일어나는 일이고, 11절은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현재에 일어나는 일은 몸이 죄로 인해 죽는 것이고, 영은 의로 인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상태입니다. 몸은 죽은 상태입니다. 살아있으나 실제는 죽은 것입니다. 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져 나가면 잠시는 자랄지 모르지만 죽는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순간 아담 안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몸의 종착지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본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몸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성령으로 인해 인간의 거듭난 영이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살아났습니다. 몸은 죽었으나 영은 살았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현재의 상태입니다.
10절은 현재 일어나는 일이고, 11절은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현재에 일어나는 일은 몸이 죄로 인해 죽는 것이고, 영은 의로 인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상태입니다. 몸은 죽은 상태입니다. 살아있으나 실제는 죽은 것입니다. 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져 나가면 잠시는 자랄지 모르지만 죽는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순간 아담 안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몸의 종착지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본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몸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성령으로 인해 인간의 거듭난 영이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살아났습니다. 몸은 죽었으나 영은 살았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현재의 상태입니다.
미래는 어떤 상태입니까?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으로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몸의 부활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걷는 사람은 현재의 확신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자유입니다.
왜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까? 우리의 현재 상태와 미래 상태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정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 몸의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기밖에 더하겠어?”라고 각오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 몸의 부활이 약속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기밖에 더하겠어?”라고 각오하면 안 됩니다. “살기밖에 더하겠어?”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사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정죄 받지 않았기에 자유롭고, 우리에게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따르는 자유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을 따르는 자유가 우리의 삶 속에 충만히 흘러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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