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영광에 이르는 소망 (로마서 8:18~25)

새벽지기1 2022. 10. 15. 06:32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을 설명하는 단어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그 단어는 ‘앞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미래 측면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구원을 세 가지 시제로 설명하면, 과거는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의 구원’입니다. 현재 측면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성화의 구원’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8장 17절까지는 칭의의 구원과 성화의 구원을 말씀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4장 25절까지는 칭의의 구원, 로마서 5장 1절부터 8장 17절까지는 성화의 구원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의 미래적 측면입니다. 영화롭게 되는 ‘영화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과 함께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그 영광을 상실했고, 영광스럽지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본래 인간이 영광스러운 존재이기에 영광에 대한 굶주림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느끼는 비참함, 자존심, 명예욕 등은 모두 영광에 대한 굶주림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가운데 인간만이 비참함을 느끼고, 자존심이 상하며, 명예욕을 추구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경쟁을 통해서 더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기 원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 실패에 대한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참함을 느낍니다. 왜 인간은 비참함을 느낄까요? 무엇인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비참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파스칼은 “인간이 비참함을 느끼는 것이 곧 위대한 존재라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인간은 원래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음을 받았는데 그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 회복할 수 있는데, 인간 스스로 영광을 회복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회복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명예욕이 되고, 비참함, 자존감의 상실, 열등감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였음을 알고, 죄로 말미암아 영광을 잃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믿고, 깨닫고, 체험한다면 이 세상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광에 목마른 자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과 지옥의 형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구원의 끝이자 절정은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에서 영화롭게 되는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상태보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고, 구원받는 성도들은 영광에 이르는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죄의 영향력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간 것이고, 가로막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죄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고, 다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광에 이르는 소망으로 승리
“이는 우리가 이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하겠습니까?”(24절).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의롭게 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영광에 이르는 소망 가운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이들에게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8절은 ‘현재의 고난은’으로 시작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18절). 
여기서 ‘현재’는 시점이 아니라 ‘이 세대’를 의미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며,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세대입니다. ‘앞으로’라는 말은 이 세대가 끝난 이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세대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세대는 고난의 세대입니다. 
이 세대에서 영광에 이르는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이 환영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성도로 살면서 받는 고난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어떤 희생이나 고난이 없을 때 우리는 영광을 바라보기보다 세상의 헛된 영광을 취합니다. 
여러분, 핍박 속에 있는 초대교회가 서로 다툴 수 있는 여력이 있었겠습니까?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열이 있었지만, 그 분열의 이유는 배교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 허락해야 한다는 다툼이었습니다. “누가 더 큰 자인가?”의 다툼은 없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의 많은 위기는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의 여정을 함께 겪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데 있어서 짐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전심전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광에 이르는 소망 가운데 있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세대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과해서 우리는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왜 우리가 고난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앞으로 이 고난이 사라지고, 이 세대 가운데서 상황이 좋아질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때 이전에는 세상은 갈수록 악해질 것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교육 기관이 많아지고, 경제가 부유해지면 사람들이 더 선해질 것이고, 훌륭해질 거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역사에 대한 전망은 더욱 어둡습니다. 우리가 이 세대 가운데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고난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나아지기는커녕 죄와 고통과 갈등과 전쟁과 지구에 요동치는 지진과 수많은 자연재해와 악들이 만연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준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대가 짐승들로 비유할 수 있는 원수들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고, 고난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고, 갈수록 악한 형태로 찾아옵니다. 시대마다 매우 교활하고 거짓된 사상과 세계관으로 나타나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 시대에서는 성을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성으로 정의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교묘한 사상과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대는 갈수록 교활해지고, 악해집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대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도리어 소수자가 되는 시대입니다. 주변인이 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센 무신론의 물결이 강하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로마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사회에서 정직하고, 거룩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고난 속으로 접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앞으로 나타날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다시 나타날 때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입니다. 고난의 세대에 우리는 영광에 이르는 소망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소망가운데 생명의 열매 맺는 탄식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분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도 소망 가운데 있으니 이는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19~21절). 피조물은 영어로 ‘크리처(creature)’입니다. 그런데 ‘피조세계(creation)’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세계도 장차 나타날 영광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고대한다’는 것은 강렬하게 기대하며 얼굴을 앞에 내밀고 기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피조세계를 의인화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을 고대합니까? 자신들의 상태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과 긴밀하고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세계가 영광스럽게 될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순간입니다. 왜 이렇게 피조세계와 하나님 자녀들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까? 피조세계가 탄식가운데 있게 된 것이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세계가 탄식하고 있는 것,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은 인간 죄의 결과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 말씀에서 타락한 직후 하나님이 아담에게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을 것이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은 흙으로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넓게는 피조세계 전반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천지’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세상과 보이는 모든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의미인 것처럼,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전반적인 저주가 임했다는 뜻입니다. 저주가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땅의 모든 것을 중지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었던 영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스며들어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피조세계가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제역할 하지 못합니다.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죽음에 처한 것이 아니라 피조세계도 죽음에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세계에 죽음의 씨앗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도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모든 자연이 썩어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썩어짐을 통해서도 새로운 일을 하십니다. 낙엽을 두면 썩어서 비료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다시 사용하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피조세계는 썩어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스러워하기까지 고대합니다.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루속히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고통스러워하기까지 탄식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2절).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라는 것은 피조세계의 탄식은 우주적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세계가 함께 탄식하며 고통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구원의 위대함은 그 범위가 우주적인 것에서 나타납니다. 모든 피조 세계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몸의 구속까지 입는 것처럼, 인간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회복됩니다. 그들도 구원을 받는 것이고, 영광에 이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탄식을 ‘해산의 고통’으로 비유했습니다. 피조세계의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소망의 탄식입니다. 피조세계의 탄식은 소망적인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단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의 탄생이라는 희망이 있는 것처럼, 피조세계의 탄식은 절망적 탄식이 아니라 언젠가 소망가운데 생명의 열매를 맺는 탄식입니다. 
영원한 영광이 이르는 소망
“그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우리조차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됨,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3절).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몸의 구속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로운 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셨을 때 영광스러운 몸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처음에 못 알아봤지 않았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모르다가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영광스럽게 된 몸이 예수님이 육신을 입었을 때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이 되셨을 때 제자들이 선뜻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것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의 몸도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성령의 첫 열매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첫 열매’란 우리에게 성령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부활할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속, 영광스러운 몸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이들은 더욱 간절히 탄식하며 소망합니다. 피조세계도 탄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탄식합니다.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소망의 탄식이요, 영광에 이르는 소망의 탄식입니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때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며 탄식합니다. 모두 영광에 이르는 소망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탄식하며 우리가 그 영광을 소망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이 없기에 탄식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의 즐거움만을 찾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광에 이르는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며 오히려 탄식합니다. 영원한 영광이 이르는 소망을 가진 이들은 이 세상에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갑니다.  
날마다 성화의 구원을 이루고, 
영광스럽게 될 것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이는 우리가 이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하겠습니까?”(24절). 
참으로 구원받은 자, 의롭게 된 자, 거룩함을 이루는 자들은 영광에 이르는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참된 신앙의 척도입니다. 거짓 신앙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 영광스럽게 될 구원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영광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 세상에 진정한 영향력을 주며,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있어야 할 것이 날마다 성화의 구원을 이루고, 영광스럽게 될 것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찬송가 407장 1절이 이 내용으로 작사된 것입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언제나 주를 바라보는 소망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영광에 이르는 소망이 삶의 능력이 되고, 원리가 되고, 법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