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도우시는 성령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로마서 8:26~30)

새벽지기1 2022. 10. 28. 07:22
로마서 8장은 성도들이 받은 구원의 확실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구원이며, 하나님이 그 구원을 보증하심을 말씀합니다. 이를 종교개혁자들은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중요한 교회의 교리로 가르쳤습니다.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유산으로 여겼습니다. 당연히 로마 가톨릭은 이 교리를 강조하지 않고, 심지어 믿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만일 이 교리를 강조하고, 이 진리를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알리면 로마 가톨릭의 체제가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견인이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는 성령님의 내주와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떠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이를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받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보증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8장 구절마다 성령님이 등장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2절),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5절), ‘그리스도의 영’(9절),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11절),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13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사람들’(14절), ‘양자의 영’(15절), ‘성령은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합니다’(16절), ‘성령의 첫 열매’(23절)라고 했습니다. 구절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완전한 구원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역사하시고, 증언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확실함 가운데 거할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많은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죄, 질병, 마음의 아픔, 낙심 등 여러 연약함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연약함은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연약함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이성은 기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감정과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이성, 의지에 묶여서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자신이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 아름다운 땅을 보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광야 40년을 이끌었고 출애굽을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볼 수 있고, 허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단호하게 모세에게 “그만해라. 족하다.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조차 자신이 무엇을 마땅히 구해야 할지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살피셔서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구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연약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놀라운 증거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마땅히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도우신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일일이 지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져야하고, 판단해야 할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기도는 우리가 합니다. 성령님은 중보기도로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돕는 두 분이 계십니다. 한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앞에 서지 않도록 우리를 변호하시고, 모든 고발로부터 보호해 주심으로 도우십니다. 또 한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대신 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깊은 비밀을 우리가 체험함으로써 완전한 구원을 확신하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도우시고, 성령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도우십니다. 두 분 모두 완벽한 병행을 이루시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알려주심으로 도우십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가 고난 가운데 기도할 수 없을 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지 못하면, 성령님이 친히 탄식하시며 간구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가만히 있는 곤비한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 신음까지 기도가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의 신음소리를 읽으시고, 들으시고,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친히 탄식하시며 하는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가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완전히 주어진 구원을 우리가 날마다 확신 가운데 누리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기도를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살아가며 완전하고, 확실하고, 영원한 구원을 체험하고, 확신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기도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많은 확신과 지식을 알려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두 축이 영원한 구원을 이 땅에서 누리는 확신의 통로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지상에 계실 때 많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셔야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필요한 존재일까요?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함으로써 온전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누리고,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구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줄을 압니다”(28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거야’라는 말씀으로 위로하기 쉽습니다. 정말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그 앞에 대상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하다 보면 잘 될 거야’라는 낙천주의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다 좋게 될거야’라는 세상적인 긍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원문은 번역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번역이 나오고, 학자마다 논란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번역은 영어의 AV번역을 직역한 것인데, 많은 학자들이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NIV번역은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하여 일하신다”고 번역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선을 이루는 것처럼 해석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의 모든 일속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주권이 있다는 것이 배경이지만, 모든 것이 저절로 선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무엇일까요? 구원입니다. 최종적이고, 완전하신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잘 안될 때 “이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야”라고 할 수 있는 맥락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으로 위안을 받으셨던 분은 실망했을지 모르겠지만, 잘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때로 고난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선이 구원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인데, 인간의 탐욕이 원하는 방식으로 잘 된다면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그것은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바라보는 우리를 위한 선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끊기도 하십니다. 세상에 염증을 느끼도록, 세상이 싫어지도록 상처받는 일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박사는 이 말씀 속에 나타난 다섯 가지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안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신다. 셋째,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우리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신다. 넷째,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해 일하신다. 다섯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또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부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도록 내가 택했어”라고 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때로 우리 삶에 간섭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길을 때로는 가지 못하게 하시고, 원하지 않는 길을 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는 말씀이 29절과 30절입니다. 2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섯 단계로 나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위대한 사슬’이라고도 부릅니다. 
구원의 위대한 사슬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그 아들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29~30절). 
첫째, ‘하나님의 미리아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을 미리 예정하신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을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선택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에게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사랑의 깊은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미리 안다’는 것은 ‘미리 사랑하셨다’, ‘먼저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어떤 결정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결정 이전에 하나님의 결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미리 아시며,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결정이 있었습니다. ‘정하다’는 단어는 영어로 ‘호라이즌(horizon)’의 어근이라고 합니다. 볼 수 있는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예정에 대한 많은 오해가 아직도 많습니다. 예정은 하나님 편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누구는 구원할 것으로 정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을 것으로 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정은 우리 편에서 봐야 합니다. 우리 편에서 본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셨고, 나를 미리 아시고, 나를 미리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그분께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해결해 보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도 전에 인간의 타락의 가능성을 아셨고, 타락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아시고 결정하셨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구원 받은 성도들의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를 가로막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데 우리가 왜 복음을 전합니까?”라는 주장은 완벽하게 예정론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예정의 의미를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고백하는 단어입니다. 예정론의 근거가 된 사도 바울의 수많은 서신은 자신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하다보니 하나님이 미리 나를 아셨고, 사랑하셨고, 택하셨고, 부르셨고, 그랬기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결정 이전에 하나님의 미리 결정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고, 나를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나를 예수님처럼 닮아가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맏아들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적인 의미로 맏아들의 영광, 우리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더 영광을 받으시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미리아심과 미리 정하심이 한 세트라면 그 중간에 세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정하실 뿐만 아니라 일하시는 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부르심이요, 내 편에서는 믿음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증거입니다. 그 부르심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초청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는 초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부할 수 없는, 잡아당기시는 부르심입니다.  
넷째,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심’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상태와 상관없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되었을 때, 연약할 때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근거로 하나님의 의를 선물해 주시는 것이 의롭다하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다섯째,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심’입니다. 모든 죄가 사라지고, 몸과 영혼이 완전해지는 영광스러운 상태입니다. ‘칭의’와 ‘영화’만 나오고 왜 ‘성화’가 없습니까?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미래 시제로 말하지 않고, 과거 시제를 썼습니다. 신약에서는 너무 선명하게 실현될 것은 과거 시제로 표현합니다. ‘예언적 과거’라는 시제를 씁니다. 29~30절에 기록된 다섯 단계 모두 과거 시제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완전한 하나님 자녀의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되며,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한 자이기에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고 할 때, 그 사이에 뭐가 들어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을 해야 하고, 면죄부를 사야한다는 등의 논리가 비집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취소되지 않는 구원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과거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그것 또한 오해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더욱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거룩하지 않게 살았습니다. 나에게는 온전한 구원이 약속되어 있고, 영광스럽게 되고, 의롭게 되었기에 영화롭게 될 소망을 가진 자마다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살아가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완전한 믿음은 현재에서 불투명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소망은 확실한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비전과 소망은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소망과 비전은 확실한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과거시제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의 확실함을 체험하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일을 날마다 이루어 가십니다. 성령님 덕분에 이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구원의 확실함을 날마다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더 깊이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영원한 구원, 완전한 구원, 온전한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도우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확신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날마다 체험함으로 깊은 확신에 이르러 
이 땅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