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1~39)

새벽지기1 2022. 10. 29. 06:58
이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역사는 불확실성의 역사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도 불확실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속에 살아갑니다. 어떤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가장 안정감 있는 영혼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 때문이며, 에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신 있는 삶으로 살아가는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결핍된 영혼일수록 불안하고 두려움이 많습니다. 모든 인간사의 문제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사랑결핍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르고 풍성한 사랑 속에 거하는 영혼은 불안이 없고 담대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요동치는 상황에서도 안정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깨닫고, 믿고, 체험하고, 확신하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상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완전히 용서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로마서 8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의 영원한 안전에 대한 완벽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 구원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구원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서 옵니까?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옵니다. 우리의 모든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옵니다. 그 사랑은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질문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 질문을 쏟아내는데,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확신을 전달하기 위한 질문들입니다. 31절에서 “그러면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확신에서 나오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찬양의 고백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부를 수 있는 거룩한 승전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39절b). 
로마서 8장 1절은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라고 시작하고, 마지막 39절은 “끊을 수 없습니다”로 끝납니다. 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끊을 수 없을까요? 
첫째,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용서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용서를 보여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1~34절까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아무도 대적할 수 없고, 아무도 고소할 수 없고, 아무도 정죄할 수 없음을 질문을 통해 강조합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31절).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하겠습니까?”(33~34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다”라고 하셨는데, ‘좋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심히’라는 것은 ‘흘러넘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배신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 높고 높은 하늘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음에 넘기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시는 사랑,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자신을 내어주신 것보다 큰 사랑입니다. 
2004년 제가 미국에 유학을 가자마자 아들의 신장에 문제가 생겨서 치료가 필요했습니다. 계속 문제가 생기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들에게 문제가 생겨서 심각해졌을 때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내가 죽음으로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랜 고민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 순간 ‘내가 죽어서 살려야지, 내 안에 모든 것을 끄집어내서 이식을 하든, 뭘 하든 고민이 되지 않는 걸 보면서 하나님이 아들을 죽음에 넘기셨다는 것이 당신의 희생보다 큰 사랑이라는 깨달았습니다.  
옥타비누스 원슬로우(Octavinus Winslow)라는 분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었는가? 유다가 돈 때문에 내어준 것도 아니고, 빌라도가 두려움 때문에 내어 준 것도 아니며, 유대인들이 시기심 때문에 내어 준 것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 받으시는 사랑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자신을 내어주신 것보다 큰 사랑입니다. 왜 아들을 내어주셨습니까?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성육신하시고, 자기 아들을 죽음에 넘기시고, 결국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완전한 용서가 주어졌기에 이제 이 고백이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고소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삶을 보면 사탄이 정죄하고, 고소할만한 모습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를 고소하고 정죄하면 인정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는 즉시 사탄은 우리를 고소하며 정죄합니다.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네가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가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사탄이 우리를 정죄하고 고소합니다. 이 모든 고소와 정죄 앞에서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고소하리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뻔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사탄의 고소와 정죄를 인정하고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용서를 받아본 적 없고, 한 적도 없기에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이래도 날 용서하신다고요?’라면서 사탄의 고소와 정죄를 받아들입니다. ‘그렇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기보다 그 사랑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곁에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사탄의 고소와 정죄 앞에 휩쓸리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죽었을 뿐 아니라 살리심을 받으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34절).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간구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끊임없이 사탄의 고소와 정죄 앞에 무너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기보다 자신을 향한 사탄의 정죄와 고소에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완전한 용서의 죽음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 때문에 우리 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지옥의 모든 권세들이 힘을 합해 대적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아무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확신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 멋진 환상으로 보여준 사건이 스가랴 3장에 나타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모습입니다. 
대제사장이 마땅히 입어야 할 옷을 입지 않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죽어 마땅한 것이고, 사탄이 당연히 고소할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의복을 보십시오. 저 사람은 합당한 의복을 입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공의로운 정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죄를 선언하십니다. 무죄를 선언한 까닭은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저 더러운 옷을 벗기라.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고소와 정죄의 근거가 되는 원인을 제거해 버리시고 아름다운 옷, 합당한 옷을 입힘으로 사탄의 모든 정죄를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용서를 이루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합당한 의의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셨기에 우리를 그 누구도 정죄하고 대적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둘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배고픔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 기록되기를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인해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35~37절).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끊을 수 있는 방해물들을 열거합니다. 일곱 가지 역경입니다. 환난, 곤고, 핍박, 배고픔, 헐벗음, 위험, 칼이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서가 쓰일 당시 많은 사람이 신앙 때문에 당하고 있던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고난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사랑입니다. 비슷한 시기 <요한일서>도 동일한 내용을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이룬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상 세상을 정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정복당했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를 함께 누리며 모든 고난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요 16:33). 
이미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를 나의 승리, 우리의 승리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국가대표가 경기에서 승리하면 온 국민이 우리가 이겼다고 기뻐합니다. 자신이 싸우지 않았는데 왜 이겼다고 말합니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믿는 사람들, 예수님의 부활 안에 우리의 생명의 부활이 약속된 것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최고의 고난인 죽음을 이깁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 곤고, 핍박, 배고픔, 헐벗음, 위험, 칼 등이 모두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으니 그 모든 고난을 이미 이긴 것입니다. 
바울은 시편 44편 22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그러나 우리가 주를 위해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호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시편 기자의 구절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동일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부르짖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편을 다시 쓴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 부르짖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그들은 ‘구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우리는 승리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표현이 ‘모든 것’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으로 끝이 납니다. 37절을 보시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범위는 얼마나 넓을까요? 38~39절에서 ‘모든 것’의 범위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단어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모두 해석할 필요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도, 천사들이나 악마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능력도,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38~39절).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기에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은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서 주신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더 크신 분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8~29). 
“누구도, 그 무엇도 내 손에서 구원의 백성들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서, 그 능력의 손에서, 그 희생의 손에서, 섬김의 손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전능하신 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빼앗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8장 마지막 확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할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나의 죄와 허물일지라도 말입니다. 나의 실패일지라도 말입니다. 나의 죄악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실패로 무너져 갈 때 우리는 완전한 용서를 베푸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삶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쳐 쓰러지고 넘어질 때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정죄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어떤 인생의 고난, 역사의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도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찬양과 같습니다. 쏟아져 나오는 이 질문은 확신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담대한 확신과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계속 흘러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용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