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예정 신앙 (로마서 9:1~18)

새벽지기1 2022. 11. 7. 06:47

“예정 신앙은 운명론도,

우리의 자유권과 선택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한 모습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언제나 한 극단으로 치우칠 때 올바른 진리에서 벗어납니다. 극단적 신앙에서 오해되고 오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든지, 전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예정된 자는 그리스도께로 올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정에 대한 잘못된 신앙에 빠져 있을 때 수많은 사람이 선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인간의 책임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간과하는 사람들은 억지로 믿게 하려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 다. 그들은 복음과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보다 자신의 노력을 믿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사상이 가장 중요한 진리로 여겨집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만일 택한 사람들의 등에 줄을 그려 표시해 놓았다면 나는 종일 사람들의 셔츠를 들추며 런던 거리를 다닐 것이다. 그러나 ‘ 누구든지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 그분이시기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을 그분께 맡겨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생애를 바친 사역자입니다. 동시에 그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향한 마음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동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근심과 고통 그리고 소망을 다루는 로마서 9장 말씀에서 ‘ 하나님의 예정’ 이라는 위대한 진리가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마음에 큰 근심과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동족이 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소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저주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바울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큰 근심과 고통을 느낀 이유는 혈연관계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 구원의 역사에서 동족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의 언약, 율법,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가장 중 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통해서 태어났 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불신앙을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하나님 의 말씀이 파기되었는가?”입니다. 그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파기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6절).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불신앙의 모습은 결국 이스라엘을 택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이 파기된 것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내에 이스라엘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에서 ‘ 이스라엘’ 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폭넓고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 동족’ 이라는 말이 유대인들만을 가리키지만, 갈라디아서에서 ‘ 이스라엘’ 은 이방인을 포함합니다.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새롭게 창조된, 구원 받은 모든 백성을 가리킬 때 ‘ 이스라엘’ 이라고 사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동족 유대인을 가리키고, 때로는 이방인 을 포함하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는 대답을 보충 설명합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두 자녀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입니다(9:7~9). 이스마엘과 이삭은 모두 아브라함 육신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으로 칭한 것은 이삭뿐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이 여종의 신분 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이스마엘도 분명 아브라함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책임 있는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약속을 따라 태어난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었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8절).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제외하신 것은 그나 그의 어머니 하갈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육신의 혈통으로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는 것은 육적 이스라엘 내에 영적 이스라엘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은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응답하고, 거듭난 자녀라면 이스라엘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국가적 이스라엘이나 혈통적 인 유대인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한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 아니다”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말씀,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약속은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혈통적인, 육적인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에서와 야곱의 예

 

또 다른 예를 덧붙입니다. 두 번째 예는 이 삭의 두 자녀 에서와 야곱의 예입니다 (9:10~13). 첫 번째 예는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녀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 예는 약속과 또 다른 차원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또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인하지 않고 오 직 부르시는 분으로 인해 서게 하시려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 길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11~12절).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서 이뤄가시는 뜻이 있습니다. 리브가의 뱃속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녀, 에서와 야곱 가운데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13절에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라기 1장 2~3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미워하셨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고대 근동문화에서 ‘ 미워하다’ 는 감정적인 단어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동일한 단어를 쓰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가족들을 미워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것만큼 이상한 말씀이 없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표현은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이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밖의 영역은 우선순위 밖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가족을 미워해야 한다는 표현은 가족 일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 우선순위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서 이루시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때 반드시 선택의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8~30절에서 하신 말씀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결단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이전에 미리 정하시는 선택이 있었고, 미리 아심이 있었습니다. 리브가의 두 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어떤 행실을 보이기도 전에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있었고, 미리 정하심이 있었고, 미리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 다. 여기서 ‘ 예정 신앙’ 이 나옵니다.

 

예정 신앙,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라

 

예정 신앙이란 ‘ 나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과 부르심에 의해 이루어졌다’ 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정 신앙에 대한 고백이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성도의 영원한 안전, 성도의 견인이라는 진리를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 직후에 하나님이 영원하고 안전한 구원을 주셨다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과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신 계획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구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의 선함과 의로움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에 근거하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나타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영원히 안전하다는 믿음이 예정 신앙을 뒷받침해야 합니다. 예정 신앙을 사람들이 거부하는 이유는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운명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에서는 예정 신앙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 모든 것은 자기하기에 달려있다’ 는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고, 인간의 선택에 따른 변화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 내가 어떻게 하느냐’ 에 달려있지 않는 영역도 너무 많습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얻지 못하는 사회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또 내가 구하지 않은 것도 얻는 영역이 있지 않습니까? 예정 신앙에 대한 오해는 인간의 판단이나 선택을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예정 신앙은 인간의 판단이나 선택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판단과 선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중요하게 만들어 줍니다. 인생의 운명이 나의 선택과 판단에 달려 있다면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만큼 불안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고, 미리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분,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내가 이 땅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을 아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참된 인생이라고 믿는 것이 예정 신앙입니다. ‘ 내가 아니라 하나님 하시기 나름’ 이라는 것을 믿는 것 입니다. 나의 선택과 판단 이전에 나를 미리 아시고, 택하시 고, 부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이며, 그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예정 신앙입니다. 예정 신앙이란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을 따라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하심에 따라 좌우되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의하다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의하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달음질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14~16절).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불의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비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천국에 가야 마땅한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인류는 배교적 뿌리에 정죄함이 있기 때문에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해도 아무도 하나님의 공의에 불평할 수 없다.” 모두가 천국에 가야 마땅한데 하나님이 일부만 천국에 데려가셨다면 불의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지옥에 가야 마땅한데 구원의 과정과 선택을 통해서 계속 긍휼을 베푸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정 신앙은 선택하신 이들에게 긍휼하심을 베푸신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로에게 말씀하기를 ‘ 내가 이를 위해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인해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서는 원하시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17~18절).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구절은 난해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십니까? 이것도 앞에 ‘ 미워한다’ 는 말과 같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이 완악함을 의미합니다. 교양과 교육, 문화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악함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완악함을 제어하심으로 더 심한 악과 죄에 빠지지 않게 하고 계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제어해 주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혼란하게 될까요? 많은 무신론자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말 할 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전쟁이 일어나며, 악한 사람이 횡행합니까?”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거꾸로 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제어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그나마 우리가 거리를 다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통제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숨 쉬고 사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이 완악함을 끝까지 고집하는 자들에게 그 완악함을 제어하는 은혜를 벗겨주십니다. 그 장막을 내버려 두심으로 그 완악함이 표출되게 해서 스스로 악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로마서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내어버려두심의 심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를 심판할 때는 그 사람 안에 악을 만들어 넣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있는 완악함이 스스로 길을 가도록 보호하시는 은혜의 장막을 잠시 거두시는 것입 니다. 그러면 인간은 악의 열매를 스스로 먹고 자멸합니다.

 

예정 신앙이란 하나님이 완악한 자를 통해서도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악한 인간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택함을 통해서 구원하고 계십니다. 먼저 택함 받은 자들을 통해서 또 다른 자들을 택하는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언제나 선교를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택해서 긍휼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때로는 스스로 완악한 길을 결코 버리지 않는 이들이 그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악의 무서움을 보여주시고, 구원의 길로 오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모르고, 이 세상 일도 모르고, 어떤 운명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함에 내버려둘 자를 내버려두심으로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예정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신앙은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저주를 받을지라도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선교적 열망을 갖게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고통스러워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우리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었고, 우리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바로 이것이 결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 모습입 니다. 예정 신앙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예정 신앙은 우리의 모든 자유권과 선택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한 모습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잃어버린 영혼, 하나님 밖으로 휩쓸려 가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고, 결단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