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겸손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완악함에 빠져있는 자들은 멸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게 되어서 더 깊은 선교의 열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을 시작하면서 동족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한 큰 근심과 고통을 고백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의 운명은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것이기에 자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운명론을 가졌더라면 왜 이런 마음을 갖겠습니까?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라도 받겠다는 헌신을 왜 표시했겠습니까? 또 바울이 로마서 10장 1절에서 “내 마음의 소원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기도가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었기에 노력과 선택과 기도를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바울은 하나님 역사의 통로가 되었던 이스라엘 대다수에게 불신앙이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구령과 선교의 열정을 더 깊이 갖게 된 것입니다. 참된 예정신앙은 선교적인 신앙으로나타납니다.
로마서 9장 전반부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해 파괴되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안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라고 해서 모두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앞에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뒤에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게 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말 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두 자녀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지만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가 아니기에 그는 이스라엘로 분류되지 못했습니다. 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녀이기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따라 태어났느냐의 기준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분류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자녀일지라도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의 어떤 행위나 인격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야곱을 먼저 택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적인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권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을 따라 이스라 엘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족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 방인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스라엘 대다수 사람들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불의하심의 증거가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대답도 “아니다 ”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만 선택하셔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불의한 것이 아니냐는 질 입니다. 왜 모든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잘못된 이유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구원받아 마땅한데 하나님 이 일부만 선택하셨다면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심판받아 마땅한데 왜 모두를 구원하지 않고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긍휼하심을 주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먼저 택한 이들을 통해서 남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전달되도록 하는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이 임하지 않는지, 그것이 왜 불의한 일이 아닌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전하며 반기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답을 한단 말입니까?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자에게 ‘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 라고 대들 수 있겠습니까?”(20절). 욥은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욥기 후반부를 보면 하나님이 전혀 대답해 주시 지 않습니다. 도리어 욥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물을테니 대답해 보아라.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누가 그 크기를 정했느냐?”를 시작으로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핵심은 “피조물인 네가 창조주인 나의 계획을 다 알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들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위로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을 던지셨고 회개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려주셔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가 지으신 분에게 따지는 질문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토기 장이와 진흙의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막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21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귀하게 창조하셨고, 어떤 사람은 천하게 창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믿도록 창조되었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도록 창조되었다는 운명론 혹은 결정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흙은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 님이 흙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진흙으로 그릇을 빚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미 진 흙으로 존재하는 것을 그릇으로 빚으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진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창조된 상태이지만 타락한 인간의 상태, 타락한 인성, 타락해서 하나님을 떠난 진흙에 불과한 인간의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에 지옥에서 심판을 받을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들이 원죄의 결과로 타락한 인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진흙 한 덩어리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진흙 한 덩어리와 같은 타락한 인간을 그릇으로 빚으신 것입니다. 귀하게 쓸 그릇과 막 쓸 그릇으로 만드실 권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진흙 한 덩어리와 같은 존재를 그릇으로 빚든 진흙 덩어리로 버리시든 그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진흙 덩어리에 불과한 우리들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는 귀히 쓰는 그릇으로 빚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귀하게 쓰는 그릇이 됐다면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십자가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진흙 한 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진흙 한 덩어리를 그릇으로 바꾸시고, 진흙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어떤 이에게는 베풀지 않는 것이 불의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권한 때문입니다.
“멸망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둘째,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멸망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리시고자 멸망 받도록 예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22절).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전체의 멸망을 집행하셔도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고 일부를 선택해 구원하시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하나님은 왜 모든 인류를 멸하시는 것이 마땅함에도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가?”라는 질문이 정확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오래 참으십니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오래 참으시고, 또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가 핑계할 수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연대는 어떻게 계산해도 오랜 시간입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역사는 하나님 인내의 길이입니다. 인내의 깊이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을 단순하게 오랜 기간을 빼버리고, 하나님 이 일부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버리시고 무자비한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으십니다. 당장 멸망해야 마땅하고, 이미 노아의 홍수 때 모두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들이었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살리셔서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셨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그때에도 하나님이 심판하셔야 마땅한데 흩으심으로 또 참으셨고, 그 이후 수많은 역사 속에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완악함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에서 멸망의 장소인 지옥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이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증거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지옥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이 참된 사랑이시기 때문에 지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한 완악한 이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떨어져도 회개하지 않고, 저주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전도폭발을 창시한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이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다섯 사람이 은행 강도를 모의했다고 합니다. 그 다섯 사람이 자기 친구라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친구들에게 “제발 그런 악한 일은 하지 말라”고 간청하고 빌었습니 다. 그런데 다섯 친구들이 이 친구를 밀쳐 내고 출발합니다. 마지막으로 나가는 친구를 붙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서 뒹굴며 싸워서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결국 네 친구만 계획대로 은행을 털었습니다. 결국 네 친구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 고받습니다. 강제로 가지 못하게 막아서 범행에 가담하지 못한 친구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습니다. 네 친구는 죄를 지음으로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범죄에 가담하지 않은 한 친구는 착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친구가 막아주었기 때문에 그가 범죄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바로 이런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왜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게 하지 않으시는가?”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끝까지 거절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구원을 끝까지 거절하는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완악함을 버리지 않기에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
셋째,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두심으로써 ‘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게 하십니다.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해 그분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면 어찌하겠습니까?”(23절). 그분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악에 대해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죄를 벌하심으로 그분의 거룩한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애굽 군대를 바다에서 심판하신 이후 모세와 이스라엘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주처럼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우시며 찬양을 받을 만한 위엄 이 있으시며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겠습니까?”(출 15:11). 하나님은 거룩한 심판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 다. 그것을 더욱 풍성하게 나타내시는 것은 긍휼을 통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 영광을 얻는 순간’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진노의 심판이 쏟아진 사건인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의 모든 증거들 중에 가장 놀라운 영광의 증거입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긍휼이 임하지만,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을 거절하는 이들은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악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며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시고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진흙 덩어리를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빚으신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를 끝까지 거부하는 이들은 진노의 그릇으로 빚어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긍휼의 그릇으로 빚어져 하나님 역사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이 그릇으로 부르셨으니, 곧 유대 사람 가운데에서뿐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에서도 부르셨 습니다”(24절). 우리는 진노의 그릇인가, 긍휼의 그릇인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믿기로 혹은 믿지 않기로 결정된 운명이 아니라 오래참으심 가운데 십자가로 나타내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유대 사람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육체적인 혈통으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들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방인들 중에서도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된 계획입니다.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받는 자라 부를 것이다’ ‘ 그리고 ‘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라고 그들에게 말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대해 부르짖기를 ‘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 래알 같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다. 주께서 그 말씀하신 것을 땅 위에서 온전하고 신속히 이루실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하기를 ‘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같이 되고 고모라같이 됐을 것이다’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25~29절). 앞에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수가 모래알처럼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내에 이스라엘이 있고, 이방인 가운데서도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 사람이 의, 곧 믿음으로 인한 의를 얻었으나 의의율 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30~32절). 많은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자들이 율법의 진정한 목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행위로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준 것인데 도리어 율법을 가지고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유대인들을 버리기로 작정 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기를 원하는 그들의 완악함 때문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총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참고 기다리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긍휼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완악함, 자존심, 자기 의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죄악의 걸림돌에 걸려 믿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멸망 받는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과 긍휼하심에 의해 주어집니 다. 우리의 완악함을 고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는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잘났고, 자기만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모이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받도록 창조하시거나 멸망 받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정에 대한 오해를 씻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겸손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끝까지 완악함에 빠져있는 자들은 멸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과 완전한 조화를 이룹니다. 예정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더욱 간절히 나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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