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4 13

말씀 위에 굳게 세우소서 (시 119:129-136)

(2023/01/01, 성탄 후 제1주) [주님의 증거가 너무 놀라워서, 내가 그것을 지킵니다. 주님의 말씀을 열면, 거기에서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도 깨닫게 합니다.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시듯이 주님의 얼굴을 내게로 돌리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 걸음걸이를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떠한 불의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사람들의 억압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그러시면 내가 주님의 법도를 지키겠습니다. 주님의 종에게 주님의 밝은 얼굴을 보여 주시고, 주님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들이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내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립니다.] • 새해 잡감“ 주님이 주시는 기쁨..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고린도전서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린도전서9:27)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절제하고, 얼마나 자신을 비우고, 얼마나 낮아지고, 얼마 겸손했는지 사도행전에서, 바울서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 것이 성경의 어디를 보아도 그가 강한 신념의 사람이었다거나, 강한 의지의 사람이었다거나, 엄청난 노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너무도 약했지만 강할 수 있었던 것이 은혜였다고, 힘이 없었지만 힘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십자가 능력..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성탄절, 2022년 12월25일 목자들의 천사 경험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인 눅 2:1~14절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아내 마리아가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서 호적을 신고하려고 사흘 길인 베들레헴에 갔다가 그곳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아들이었습니다. 마땅한 숙소가 없어서 여관에 딸린 마구간에 머물렀나 봅니다. 아기를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 아이가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불리게 될 줄 몰랐을 겁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어느 글에 따르면 모든 아이는 잠재적 메시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탄생 소식을 목자들이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 출산도 그렇지만, 뒤의 목자 이야기도 너무 평범해서 눈여겨볼 사람이 없을 정도..

오병이어 (57)(막 6:42)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아래는 판넨베르크의 설교 “생명의 밥”의 한 대목입니다. 1974년12월 뮌헨 마르쿠스 교회에서 드린 대학예배의 설교입니다. 생명의 밥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을 배부르게 하고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돌을 빵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원자로 축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탄의 유혹보다 더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사실상 인간의 위기와 고난에 참여했기 때문에 유혹을 당한 것입니다.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킴으로써, 또한 “세계를 위한 밥”을 통해서 세계의 고난을 제거하라는 유혹 말입니다. 그런 유혹에 빠져버렸다면 예수님은 생명의 굶주림을 영원히 해..

오병이어 (56)(막 6:42)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의 밥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참된 생명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죽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생명질서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세상의 생명질서와 전혀 다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게 될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달리 예수님이 그 죽음으로부터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다는 경험입니다. 바로 이 부활 생명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이며, 첫 부활체가 되신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밥입니다. 부활의 실체적 진실여부는 일단 접어놓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실성을 예수님의 부활에서 제시했다는 것은 옳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넘어가는 생명이기 때문입니..

오병이어 (55) (막 6:42)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밥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면 이 밥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밥은 살아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그 밥이 우리의 생명을 영원하게 유지시켜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조상의 혼령이 제삿밥을 먹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결국 밥은 제한적인 생명인 셈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밥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는 데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a)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밥이라는 요한복음 기자의 진술은 초기 기독교와 오늘 우리까지 포함한 전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일..

빛의 자녀, 빛의 열매를 맺으라! (2023.1.4, 수)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8-9). 유대인이나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독도가 한국 땅이 아니라는 주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삶의 현장에서 그 정체성에 맞는 행동과 자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이전에는 어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둠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3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삶을 채우고 싶지만 정체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빛의 자녀가 되기 전의 모습, 즉 인생의 ..

축복의 마중물

축복의 마중물 “지하 심연으로 내려가 물을 끌고 올라오도록 펌프 입구에 부어주는 물이 바로 마중물(calling water)이다. 또 다른 물을 부르는 물, 어두운 땅속 깊이 내려가 잠들어 있는 지하수를 불러오는 물이 바로 마중물이다. 이처럼 마른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야 지하수를 지상 밖으로 끌어올 수 있다.” 유영만 저(著) 《학습파워》 (위즈덤하우스, 3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한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 넣고 펌프질을 할 때, 지하의 수많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습니다. 이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마중하러 간다고 하듯이, 까마득한 지하에 있는 물이 올라오도록 마중 나가는 물이라는 의미의 참 정겨운 이름입니다. 이 한 바가지의 물이 아까워 마중물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내 것이라 (신 3:1-13)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신 3:1-13) 벡성의 수를 계수하고, 성막 중심의 조직을 재편한 후에 하나님은 성막을 담당할 제사장과 레위인을 구별합니다.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을 지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이제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아론과 함께 지성소를 섬기는 일을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배의 거룩성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레 10:1-10). 하나님은 대제사장들을 거룩하게 지키고 준비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보호하심도 약..

믿음의 우선순위

믿음의 우선순위 글쓴이/봉민근 믿음이란 나를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내 욕심의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채우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기도를 해도 결국 나를 채우려는 것에서 그치면 그것이 욕심이요 이기적인 행위일 뿐이다.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은혜를 받지 못하면 헛 예배를 드린 것 같고 목회자의 능력 탓을 할 때가 있다. 사람은 아무리 욕심을 내도 자신에게 있는 욕심의 주머니를 결코 채울 수가 없다.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기도를 많이 하고 열심히 봉사하며 충성을 했다고 그것이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속에 욕심의 덩어리를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지 못한다면 모든 수고가 헛것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