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3 14

기도를 쉴 때 찾아오는 불청객(2)

셋째는 기도가 멈추면 찾아오는 불청객은 무기력한 삶입니다. 삶을 억지로 살게 합니다. 영적 포화도가 높을 때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영적 포화도 높을 때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구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찾으려고 합니다. 창조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맡겨진 책임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더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멈추면 삶이 무기력해집니다. 사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살아도 억지로 삽니다.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합니다. 불청객은 삶의 의미를 빼앗고 억지로 살게 합니다. 살아도 하루하루 근근이 살게 합니다. 일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집에 들어가도 즐겁지 않습니다. 교회..

기도를 쉴 때 찾아오는 불청객(1)

기도를 쉴 때 찾아오는 불청객(1) 구약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신약의 마지막 사도인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기도 없이 성경은 볼 수 없습니다. 이렇듯 기도의 당위성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기도를 쉬는 것은 죄짓는 일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을 멈추는 것은 명령 불복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산소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조물처럼 기도 없이 그리스도인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몸에는 산소포화도가 있습니다. 90% 이상은 아직 폐가 망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90% 이하로 내려가면 폐가 힘들어집니다. 더 내려가면 폐 섬유화가 시작합니다. 폐..

아무것이나 제물로 드리지 말라!(창 7:1-16)

아무것이나 제물로 드리지 말라!(창 7:1-16) 본문은 노아의 가정과 정해진 짐승들을 방주에 태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노아가 순종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든다. 왜 하나님은 방주에 ‘부정한 짐승’을 태우라고 하셨을까?‘(2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방주에 태우신 이유는 인간들의 식용을 위해서가 본질이 아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제물용이다. 그렇다면 왜 ‘부정한 짐승’도 탐선 시키셨을까? 아마도 그것은 장차 노아의 자손들(백성)이 제사를 드릴 때 ‘성별(구별)’하여 예배 하도록 교육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즉 ‘아무 짐승이나 제단에 드리면 안 된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함 말이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한복음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7:37-39) 사람의 마음이 생명력이 넘치고, 여유가 있고, 윤택하고, 인격적 균형이 잡히고, 선하고, 의로우며, 공평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충만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의 마음이 점점 더 이렇게 되어가고 있다면 참으로 잘 살고 있고,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점점 다 사막화 되어가고, 황량한 광야 같고, 피폐해져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생명력을 잃은 사막과 같은 마음에라도 강줄기를 내고,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는..

종교성을 티 내지 말고 참된 영성으로! (2022년 8월 23일 화요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태복음 6:16). 오늘 우리 시대에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이기도 하고 비난 받으면서 더욱 생각하게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간 우리가 너무나 종교적인 티만 내면서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참된 사명을 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종교인들을 향해 그런 지적을 하셨습니다. 금식이라는 행위는 하나님께 무언가 특별하게 부탁드릴 것이 있고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는 강한 의사 표현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음식을 먹고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으니, 금식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금식의..

예수님의 말걸음 (2)(막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막 3:3)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에게 사람들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복해 있는 문제들을 공론화하려는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설령 사람들과의 마찰이 확대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문제의 실체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고발하려는 사람들과의 마찰을 줄이면서 손 마른 사람을 도우려고 했다면 그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서 고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밀의종교들처럼 자신들끼리만 모여서 무엇을 작당하지 않습니다. 본회퍼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의 주변이 아니라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죽..

예수님의 말걸음 (1)(막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막 3:3) 지금 예수님이 처한 상황은 매우 곤란해보입니다. 한쪽에는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손 마른 사람이 거의 무기력하게 앉아있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냥 모른척하고 회당을 빠져나왔을지 모릅니다. 도와달라는 구체적인 요구가 없는 마당에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는 일이니까요. 손 마른 사람을 못 본척하고 그 상황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원망할 사람은 별로 없었을 테니까요. 요즘도 우리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

에스겔서 5장: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

해설: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589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또 다른 상징 행동을 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칼로 그의 머리와 수염을 자르고 저울에 재어 삼등분으로 나누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기간이 끝날 즈음에 삼분의 일은 불로 태우고 삼분의 일은 성읍 둘레를 돌면서 칼로 내려치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어지게 하라고 하십니다(1-2절). 예루살렘 주민의 일부는 전염병에 죽고, 일부는 칼에 맞아 죽고, 일부는 포로로 잡혀갈 것을 행동으로 예언한 것입니다(12절). 또한 주님께서는 머리카락의 일부를 옷자락에 싸매 두었다가 불 한 가운데 던져 살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역시 이스라엘에 닥칠 재앙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3-4절). 그렇게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낙태죄 위헌 판결에 대하여 / 정두섭 목사(전주 소망교회)

하나님이 경고하시고, 역사가 증명하듯 성적인 타락과 방종은 개인과 가정과 나라를 망하게 한다 진리는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과 선지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신 중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했다. “여기서 떠나십시오.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선지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

나의 왕이시여

나의 왕이시여 나의 몸을 온전히 데이빗 리빙스턴(1813-1873)과 존 리빙스턴은 형제지만 그 삶의 목적은 전혀 달랐다. 존은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기를 꿈꾸었고. 데이빗은 어려서부터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두 소년은 각기 그 꿈을 달성하엿다. 존은 부자가 되었고 유명한 인사가 되었고 데이빗은 아프리카 탐험 선교사가 되었다. 결코 부자는 못되었지만.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기도하는 모습이었으며, 그 옆에는 죽기 직전에 기록한 일기장이 있었다. 그 마지막 일기 문에 그는 “나의 왕이시여, 나의 몸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나이다.”라고 적어놓았 다. -박재선 목사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성도’에서- 두 형제는 나름대로 그 목적을 따라 열심히 살았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