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는 기도가 멈추면 찾아오는 불청객은 무기력한 삶입니다.
삶을 억지로 살게 합니다. 영적 포화도가 높을 때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영적 포화도 높을 때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구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찾으려고 합니다. 창조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맡겨진 책임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더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멈추면 삶이 무기력해집니다. 사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살아도 억지로 삽니다.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합니다. 불청객은 삶의 의미를 빼앗고 억지로 살게 합니다. 살아도 하루하루 근근이 살게 합니다. 일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집에 들어가도 즐겁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도 감동이 없습니다. 정서가 메말라지고 멍한 삶을 살게 합니다. 기도가 멈추면 이러한 증상이 스멀스멀 나타납니다.
영적 무기력만큼 위엄한 질병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삶의 무기력을 방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것을 봅니다. 왜 사는지 모르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초기에 고치지 않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현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치료를 받습니다. 약도 처방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일상도 같습니다. 영적 무기력에 빠지면 신앙의 자리가 황폐하게 됩니다. 더 이상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쾌락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러한 불청객은 과감하게 쫓아내야 합니다. 깊숙이 들어와서 자리에 앉기 전에 몰아내야 합니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마지 자신의 집인 양 나가지 않습니다. 불청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과감하게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무기력에서 해방되고 다시금 창조경륜을 이뤄내야 합니다.
기도가 회복되면 무기력 불청객은 사라집니다. 기도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삶의 이유가 다시금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일용한 양식을 위한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탄원하고, 울부짖고, 살려달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무섭게 찾아오는 불청객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기력에 빠지지 않도록 도고를 부탁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의 권면은 누구보다도 기도가 쉬었을 때 다가오는 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밥은 굶어도 기도는 멈추면 안 됩니다.
기도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을 만들어냅니다. 세상에 맞서는 힘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어떤 순간이라도 떠나서도 안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고, 밥 먹을 때 기도하고, 말씀 볼 때 기도하고, 공부할 때 기도하고, 직장에 갈 때 기도하고, 직장에 가서 기도하고, 퇴근할 때 기도하고, 집에 오는 길에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삶이고, 양식이고 생명입니다. 그러면 무기력이라는 불청객은 도망갑니다.
넷째 기도가 쉬면 찾아오는 불청객은 의심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확신하고 걸어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믿음의 선진 들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감당하였던 비결은 바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았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첫 열매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의와 평화의 열매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지만 마지막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은 이 약속을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확신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약속에 대한 바른 지식과 확신과 매일 매일의 고백으로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은 기도의 자리에서 반복하여 고백 됩니다.
그런데 기도가 쉬면 의심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부활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심판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지금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삶도 힘든데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 투정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불의를 저지르면서 승승장구하는데 내가 못 할 일이 어디에 있냐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면 응답하신다고 했는데 왜 나는 그렇게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느냐고 불평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모습들이 점점 짜증 나게 됩니다. 목사의 설교가 재미없다. 성도들이 친절하지 않다. 교회 오는 길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의심의 영은 내면의 깊숙한 곳에 불신의 씨앗을 떨어놓습니다. 그래서 온갖 이유를 통하여 불만을 찾아냅니다. 의심은 기도를 가로막는 아주 나쁜 놈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책망하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의심이 들면 기도는 멈춥니다. 기도가 멈추면 의심이 주인 노릇을 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은혜도 누리지 못합니다. 의심이 있으면 예수님이 옆에 계시면서 말씀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찾아온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앞에 보여도 의심하므로 실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눅 24:36-38)”
의심이 있으면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길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을 의심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의심이 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불가능합니다(롬 4:20). 기도가 쉴 때 얼마나 무서운 일들이 나타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벧전5:8). 기회만 노립니다. 그러다가 기도가 쉴 때 여지없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의심의 씨앗을 사정없이 뿌리고 갑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쉬다가 이단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이단들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사단의 졸개이기 때문에 믿음의 자녀들이 기도를 쉬고 있는 상황을 찔려보고 잡아먹습니다. 한번 이단에 잡혀가면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 벗어나지만, 만신창이가 된 후에 나오게 됩니다. 이단들이 하는 행위가 의심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합니다.
기도는 이러한 의심을 이기는 힘을 갖습니다. 어떤 불청객이라고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의심이라는 불청객을 몰아내는 길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쉬면 안 됩니다. 기도의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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