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0 15

신성한 할례를 개인의 보복 수단으로 악용하다!(창34:5-24)

신성한 할례를 개인의 보복 수단으로 악용하다!(창34:5-24) 본문은 디나를 강간했던 세겜과 그의 아비 하몰은 디나 사건에 대해 야곱에게 깊이 사과하고, 두 부족 간의 연합을 조건으로 세겜과 디나와의 결혼을 요청하자, 하나님의 뜻을 알 길 없었던 야곱은 고통 중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반면,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디나의 추행 사건 이후 불타는 증오심으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중 청혼을 받자 ‘위장 수락’을 하고 조건으로 세겜 남자들의 ‘할례’를 요구했다. 세겜과 하몰은 야곱의 아들들의 제안을 즉각 받아들여 세겜 성 사람들에게 할례를 시행한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언약 표징(할례)을 자신들의 사악한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세겜의 악행은 하나님의 징벌을 마땅한 것이었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창조절 열째 주일, 2022년 11월6일 구약의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경험이 문학적으로 표현된 문서입니다. 시 형식이라서 울림이 크긴 하나 이해하기가 조금 까다롭습니다. 단어나 문장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 안에 녹아있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 설교 성경 본문 중에서 1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이 문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관해서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로우심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인 ‘웨하시드’는 성경 번역본에 따라서 거룩하심, 은혜로우심, 인자하심, 사랑 등등으로 나옵니다. 저는 우리 일상과 연결해서 볼 때 ‘선하심’이 가장 ..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브리서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브리서12:3) 예수님은 모든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밷으며 희롱 당하는 것을 참으셨으며, 발가벗겨지는 수모를 당하심을 참으셨으며, 째찍질 당함을 온 몸으로 견디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참으셨습니다. 이렇게 참으시고 구원을 이루신 것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주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만아니라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피곤하고, 낙심할 일을 많이 당하게 되는데 피곤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렇게 참으셨습니다. 또 주님은 믿음이 없고, 변화하지 않으며, 너무 더디게 성장하는 우리를 지금까지도 참아주셨습니다. ..

귀신들린 사람 (22)(막 5: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막 5:18) 이곳을 떠나라는 마을 사람들의 요구를 듣고 예수님이 무슨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일절 말이 없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곳을 떠나라는 말이오, 내가 어디를 가든지 그건 내 자유이니 상관 마시오, 하면서 옥신각신했는지, 아니면 발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내면서 똥이 무서워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니면 오늘 성서본문의 묘사처럼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그냥 타고 오셨던 배에 다시 오르셨을까요? 예수님은 경우에 따라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심문을 당하실 때 지나칠 정도로 말이 없으셨습니다.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던 빌라도는 자기를 전혀 변명하지 않는 예수님을..

귀신들린 사람 (21)(막 5: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막 5:17) 저는 어제의 묵상에서 마을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게 된 이유가 예수님이 그들을 영적으로 무언가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정확한지, 그리고 그것이 잘 전달됐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 미묘한 순간에 성서기자가 무언가 한 마디 해 주었으면 편했을 텐데 아무 말이 없군요. 이런 문제는 간단하게 생각하면 한 없이 간단하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합니다. 우리는 중간쯤의 노선을 지키면서 조금 더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서본문에 따르면 마을사람들은 두 가지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한 가지는 그 마을의 중요한 재산증식 수단이었던 돼지 떼들이 호수 안으로 들어가 몰사 했다는 소식을 돼지 치던 사람들에게서 전해들은 것..

귀신들린 사람 (20)(막 5: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막 5:17) 마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그간에 벌어진 자초지종을 다 들은 후에 보인 반응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떠나시오.” 그들이 예수님에게 사정을 했는지 강요했는지 위협했는지는 제가 헬라어를 자세하게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예수님을 그 마을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싶어 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주었다면 동네에 모시고 들어가서 큰 잔치를 베풀고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해야 할 텐데 오히려 쫓아낼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딱합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다른 이유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게 불편..

일터의 복덩이! (2022년 11월 10일 목요일)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세기 39:5). 복을 좋아하는 것은 동서양이 비슷합니다. ‘복(福)’이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많이 쓰는데 복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이시며(창 1:27-28) 우리에게도 복의 근원이 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창 12:1-3). 요셉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담긴 복을 그의 일터에서 실증해주고 있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힘든 상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일터 환경을 탓하고 사람들을 비난하곤 합니다. 요셉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형제들에게 팔려 타향에 ..

잠언 13장: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

해설: 13장에서도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을 대비한 잠언이 주를 이룹니다. 이 장에서 자주 반복되는 주제는 경청하는 자세와 물질의 문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조언과 충고에 귀를 기우리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합니다(1절). 충고는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훈계와 책망은 더욱 그렇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달갑게 여기고 받아 들입니다(10절, 18절).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망하는 길입니다(13절).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큰 유익이 됩니다(20절). 다른 하나는 물질에 관한 잠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가난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부하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기지도 않습니다(7절). 하..

공감할 수 있건만

공감할 수 있건만 “최근 사람의 뇌를 연구하는 뇌신경생리학자들은 사람의 뇌에 공감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신경세포와 신경체제가 들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소위 거울뉴런과 거울뉴런체계입니다. 이 신경세포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관찰하고 느낄 뿐 아니라, 마치 거울처럼 다른 사람에 게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도 재빨리 알아채고 반응하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과 같은 느낌, 같은 생각,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감의 생리적 근거인 셈이지요.” 박성희 저(著) 《공감》 (이너북스, 1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공감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마련된 공감을 위한 신경생리세포는 쓰면 쓸수록 더 촘촘하고 정교해집니다. ..

'참으로 크도다, 참으로 능하도다'(단 4:1-18)

'3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단 4:1-18) 느부갓네살의 고백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찬양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고백이 놀랍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꿈 해석은 느부갓네살에게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교만하였고, 자신의 신상을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명령하였습니다. 이러한 느부갓네살의 만행은 하나냐, 마사엘, 하사랴를 죽이는 일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들은 구원을 받고,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느부갓네살은 크고, 능하고, 놀랍고, 영원한 통치자로서 하나님을 높힙니다. 느부것네살에게 온 변화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