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1 13

139 - 하나님의 충만함(자기부인)(골1:19)

[기도/말씀]​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더러운 모든 영적 죄를 어린양 예수의 피로 온전히 정결하게 씻어주시고 영적 새 생명으로 새롭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의 인도와 충만, 함께하심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죄의 결박이 풀어지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 ​ [배경/해석] '충만' 충만이란 최고의 축복의 단어입니다.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충만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으로 충만한 존재입니다. 충만한 존재에게는 결핍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란?' 사탄이 충만을 줄 것처럼 유혹하나 모든 충만을 빼앗아 가 결국은 결핍을 초래하게 됩니다. 타이어 바람이 빠져나가듯,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죄를 선택하는 ..

사단의 계책이 하나님의 계획을 앞당길 때!(창37:18-28)

사단의 계책이 하나님의 계획을 앞당길 때!(창37:18-28) 본문은 요셉이 마침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을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요셉의 수고를 외면한 채 평소 요셉에게 쌓인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요셉을 해할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의 형들은 때마침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 넘긴다. 하지만 아일러니컬 하게도 요셉의 형들의 이러한 음모는 오히려 요셉이 꾼 꿈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더 빨리 실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42:7).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계획까지도 종종 당신의 선한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다(잠16:1)...

번역의 신앙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41) 본문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한번 짚어둘만한 것은 성서기자가 달리다굼을 ‘번역’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달리다굼은 그 당시 유대지역의 일상 언어였던 아람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모두 그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성서기자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게 번역해 준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기본적으로 번역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를 헬라어나 라틴어로 번역한 것은 물론이고 그 뒤로 이어진 모든 신학작업이 번역이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베레 호모, 베레 데우스”(참 인간, 참 하나님)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 직접적으로 나오는 개념이 아니라..

달리다굼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41) 비웃는 사람들을 내보시고 아이의 부모와 제자 몇 명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이를 번역하면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을 오늘 만나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저의 입장에서도 이건 말이 안 된다고 펄쩍 뛰었을 겁니다. 죽어 누워있는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는 사람은 맛이 갔거나 사기꾼이라고 빈정대거나, 조금 점잖은 어투로 죽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왕 죽었다만 편안히 보내줘야 하는 게 아니냐 하고 타일렀을지 모릅니다. 이런 게 바로 지성인들의 한계입니다. 이리..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편17:5)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편17:4-5) 당신이 보시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포악해 보입니까, 아니면 선하고, 부드럽고, 따뜻해 보입니까?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신의 마음은 포악하지 않고 선하고, 부드럽고, 따뜻합니까? 사람들이 SNS에 올린 자랑들을 보면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람들의 말들을 보면 정말 살만하고, 따뜻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정치가들, 선동가들의 말장난을 보면 금방 세상이 좋아질 것처럼 보입니다. 환경운동가들의 외침,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보면 겨울도 춥지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애호가들..

비웃음 (막 5: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막 5:40)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기 모여서 떠들며 울던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합니다. 비웃는다는 표현이 헬라어로 어떤 뉘앙스인지 제가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요. 말 그대로 비아냥거림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실증적인 사실을 거부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비웃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지요. 어떤 점에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비웃음을 좀 당해야만 합니다. 비인격적이고 파렴치한 일들로 인한 비웃음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으로 인한 비웃음 말입니다. 화이트칼라이든지 블루칼라이든지 막론하고 모든 노동자들이 동일한 연..

거리 두기

거리 두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간적, 시간적 거리두기의 장점입니다.” 이민규 저(著) 《표현해야 사랑이다》 (끌리는 책, 22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크게 보면 모두 사소한 일입니다. 크게 보면 작은 일에 너무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맹자(孟子)」의 ‘진심장(盡心章)’ 중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공자 등동산이소노(孔子 登東山而小魯)요 등태산이소천하(孔子登泰山而小天下)이라.” (공자가 동산에 오르니 노나라가 작게 보이고,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게 보이더라) 큰 것을 보면 작은 것에 연연하지 ..

일흔 이레의 기한 (단 9:20-27)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다니엘이 회개의 기도를 할 즈음에 하나님은 이미 가브리엘을 통하여 대답을 준비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어짐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기브리엘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환상과 다른 종말의 환상을 알려줍니다. 가브리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70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다는 말씀입니다. 70이레는 이레가 7년으로 생각한다면 490년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레가 7년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단지 일레입니..

카테고리 없음 2022.11.21

확신

확신 우리 영혼의 힘과 심령의 평온함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요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확신에서 나온다. 우리는 현대 세계의 혼돈과 혼란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확실하고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은혜로운 성령의 더할 나위 없는 함께하심을 확신하고 있다. -폴 스티븐스의 [영혼의 친구, 부부] 중에서- 사람은 확신하는 것에 거합니다. 확신이 있을 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확신은 우리 안에 평안을 줍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확신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이 영원하신 나의 인도자 되심을 믿기에 한 발 더 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갇힌 그리스도인

교회 안에 갇힌 그리스도인 글쓴이/봉민근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 자신에게 답답함과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믿는다고 하면서 늘 죄의 문제로 용서해달라는 말밖에 못 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좋으신 하나님 앞에서 늘 누리고 행복해야 할 인생길에 죄는 늘 걸림돌이다. 죄에 얽매여 신앙생활이 회개가 전부인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밖에 모른다.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여유도 찾지 못하고 오직 교회에서 죄의 문제에만 매달려 온 에너지를 다 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아닐 것이다. 아담을 지으시고 자연에 수많은 동식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세상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보고 느끼며 감사하며 살도록 하셨다. 그러나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