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0 13

일흔 이레의 기한 (단 9:20-27)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다니엘이 회개의 기도를 할 즈음에 하나님은 이미 가브리엘을 통하여 대답을 준비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어짐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기브리엘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환상과 다른 종말의 환상을 알려줍니다. 가브리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70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다는 말씀입니다. 70이레는 이레가 7년으로 생각한다면 490년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레가 7년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단지 일레입니다. 그런데 일..

서로를 살맛 나게 하는 일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절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과일과 곡식을 추수한 후에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도 추수 시기에 맞추어 감사절을 지킵니다. 직장을 다니든 개인 사업을 하든, 그 본질에서 있어서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노력이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 16: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 주일에 한 번 일손을 멈추고 안식일을 지키..

죽음과 잠 (3)(막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막 5:39)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예수님은 떠들며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성서가 말하는 잠은 죽음에 대한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일종의 메타포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해체하지만 잠은 일상만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뿐이라는 점에서 똑같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죽음과 잠 (2)(막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막 5:39) 야이로의 딸 이야기는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하는 말씀에 근거해서 본다면 이 사실이 더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도 떠들며 울었을 것입니다. 물론 복음서 기자들은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선생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그 슬픔과 절망의 무게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복음서가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놀라우리만큼 침묵하는 이유는 복음서 기자의 관심이 오직 예수님에게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건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일이 아니면 과감하게 생략하는 게 ..

죽음과 잠 (1)(막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막 5:39) 열두 살 소녀의 죽음으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휩싸인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왜 떠들며 우는가,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그런 신앙은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문제는 기록된 그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는 데에 있습니다. 실제로 이 아이가 죽은 게 아니라 잠든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죽었지만 그를 살리실 예수님의 그냥 잠든 것이라고 말씀한 것인지, 또는..

감사와 믿음의 방향 (2022.11.20, 주일)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누가복음 17:14-16). 예수님이 남부지방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북부지방인 갈릴리와 중부지방인 사마리아 지방의 경계선쯤을 지나실 때였습니다. 거기에 열 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께 찢어지는 듯한 절규로 외쳤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외침을 듣고 돌이키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들의 몸을 보이라” 그래서 그들은 남쪽으로 가다가 몸이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동료들 사이에서 방향을 돌려 예수님이 계신..

잠언 22장: 내게 주어진 다른 사람의 몫

해설: 22장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16절까지는 10장에서부터 시작된 ‘솔로몬의 잠언’에 속하고, 17절부터는 24장 12절까지는 ‘서른 가지 교훈’이라는 이름의 잠언입니다. 1절부터 16절은 지혜로운 삶의 유익에 대해 강조합니다. 지혜로운 삶이란 주님을 경외하며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4절).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2절). 따라서 하나님의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을 등지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일입니다(8절). 겸손한 사람에게는 친구가 끼이지만, 악한 사람은 갈등과 불화를 만들어 냅니다(10-11절).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

구멍 난 항아리

구멍 난 항아리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욕망을 구멍이 난 항아리에 비유한다. 그 항아리에는 아무리 많은 걸 채워 넣어도 뚫려 있는 구멍으로 다 새어 나간다.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구멍만 남을 뿐이다.” 스벤 브링크만 저(著) 강경이 역(譯) 《절제의 기술》(다산초당, 43-4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쳇바퀴나 구멍 난 그릇에 빗댔습니다. 구멍이 난 항아리에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결코 안을 채울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좋은 것들을 다 소유해 보아도, 우리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죄의 욕망에 빠진 우리를 가리켜 ‘터진 웅덩이’(렘2:13)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단 9:1-19)

교회에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마다 주여 삼창을 외칩니다. 주여 삼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3이 완전수이기 때문일까? 삼세번이라는 말처럼 세 번을 외쳐야 하는가? 여러 생각이 들었을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기도를 보면서 아 여기에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이 있구나하고 발견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왕으로 세움을 입은 첫 해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70년이 차면 다시 회복될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황폐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이전의 영광을 다시 볼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자 금식하고 베옷을 재를 덮어쓰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결심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주를 사랑..

믿음의 현주소

믿음의 현주소 글쓴이/봉민근 믿음이란 맡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생애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맡겼다고 하면서 걱정하고 의심하며 믿지 못할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 속에 우리의 믿음에 현주소다. 믿음은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앞에 보이는 물질이나 사람을 더 의지하고 자기 스스로의 의지나 신념을 굳게 믿고 신뢰하며 살아는 것이 믿는 자들의 실수요 큰 오류다. 거창하게 믿음을 말하고 때로는 간증도 하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불안전한 존재임을 감출 수가 없다. 인간은 바보가 아닌 이상 나약하며 불완전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자랑하며 그것을 증거해 보이기 위하여 무모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