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4 15

신앙은 머뭇거림이 아니다!(창19:12-29)

신앙은 머뭇거림이 아니다!(창19:12-29) 본문은 하나님의 불 심판의 목전에서도 소돔에서 떠나기를 지체하고 있는 롯과 그의 가족을 두 천사가 강권적으로 소돔성 밖으로 이끌어 낸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주목할 것은 (16절)라는 말씀과 (26절)라는 단어다. 신앙은 ‘머뭇거림’이 아니다. 신앙은 ‘지체 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18:21)” 이것은 엘리야의 책망이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62)“ 이 말씀은 주님의 책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 일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편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편84:2) 여호와의 궁정, 여호와의 집,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에 살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로 사모하고,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고백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 안에서 사는 하루가 믿음 밖에서 사는 천 날보다 낫고, 주님의 품 안에서 사는 하루가 주님을 떠나 사는 천 날보다 낫고, 천국에서 하루가 이 땅에서 사는 천 날보다 낫고, 주님과 깊이 만나면서 사는 하루가 주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과 교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천 날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시84:4). 왜냐..

104. 여리고의 은혜_3.라합

[기도/말씀]​​​ ​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며, 여리고의 풍성한 삶이 가정과 일터에 넘쳐나게 하옵소서. ​ '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예수님은 길을 보여주신 분이 아니라 스스로 길이 되신 분‘이리는 글을 되새깁니다. 생명과 진리의 길을 가신 예수님이 나의 구원의 주 되심이 신비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부끄럽지만 있는 이대로의 모습으로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더하소서!

성령 안에서의 자유 (로마서 8:1~11)

로마서 8장은 로마서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독일의 루터파 경건주의자 필립 슈패너는 “로마서가 바울의 전체 서신중에서 보석과 같다면, 8장은 보석 중에 진주와 같다”고 언급했습니다. 유명한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예수 나의 기쁨’이라는 칸타타를 오늘 본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구원의 안전함과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시작해서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로 끝납니다.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선언으로 끝이 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1절은 “아무것도 없다”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정죄가..

경이로움

경이로움 “디지털 화면은 경이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익숙함이 증가할수록 정신을 활성화하는 경이의 잠재력이 모조리 사라진다. 예술과 철학은 낯선 것,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배반을 철회하는 작업을 할 의무를 지닌다. 다시 말해 주관적 정신의 확정적인 네트워크로부터 타자를 구원하고 타자에게 그 낯설게 하는 경이로운 다름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병철 저(著) 이재영 역(譯) 《타자의 추방》(문학과 지성사, 94쪽)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술가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예술은 당연해 보이는 세계가 당연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낯설음의 축제입니다. 이렇듯 예술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라기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여줌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경이로움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 (2)(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예수의 가족이라고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제 교회 공동체가 소중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이 곧 교회라는 형식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과거 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일들이 많았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처가 우리에게 많습니다. 이제라도 그런 상처를 인정하고 거기서 새로운 살이 돋아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런 노력이 없으면 교회는 결국 예수의 가족으로 살..

하나님 나라 공동체 (1)(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31-35절의 결론이 바로 35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의 가족입니다. 가족 개념이 혈연공동체로부터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전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지금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걸 오늘에 적용한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교회 공동체는 매우 소중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공동체에 속해서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는 동창, 회사, 계모임, 취미 동아리 등등, 많은 공동체로 이루어졌습니다. 대개의 공동체는 이익공동체의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봉사 단체는..

에스겔서 33장: 예언자의 사명

해설: 에스겔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24장은 유다에 대한 심판 예언이고, 25-32장은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33장부터 48장까지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에 관한 예언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파수꾼으로서의 예언자의 사명에 대해 말씀 하십니다(1-9절). 같은 말씀이 3장 16-21절에도 나옵니다. 예언자는 백성에게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소임을 다한다면 그의 경고를 듣고도 외면하여 망한 사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예언자가 소임을 게을리 하여 백성이 망했다면 그 책임은 예언자에게 있습니다. 10절부터 20절은 18장 19-32절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과거에 악하게 살았다 해도 회개하고 의롭게 살면 구원 받을 것이며, 과거에 의롭게 살..

자신의 본분을 대하는 기본 / 이은숙(시인, 본보 문화부 객원기자)

지난(持難)한 팬데믹의 여름, 를 읽으며 마음을 달래본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첫 단추는 스스로를 이겨내는 것일 게다. 이것은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를 이기는 첫 단계에서부터 삐걱거릴 때가 많다. 행동거지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흔히 복장을 단정하고 깔끔하게 하는 것, 말을 차분하고 온화하게 하는 것, 절도 있고 위엄 있는 것, 예의를 알고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며 감정을 잘 다스려 불쑥 화내지 않는 것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성경을 배움으로 수양되어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것이 아닌 필요에 따른 외식적 연출일 뿐이라면 그것은 진정으로 바른 경건과 행동거지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른 행위란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욕을 이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