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3 15

96. 브엘세바의 은혜_3.에셀

[기도]​ ​ 아버지 하나님, 브엘세바의 은혜가 임하게 하소서. 한계를 극복하게 하시며, 부요하게 하시고, 생명력 있으며 나눔과 쉼의 은혜로 섬기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 [말씀]​​ ​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21:33) [묵상] ​ 왜, 굳이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살았을까?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그곳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브엘세바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족장의 센터로 삼으시고 척박한 한계를 극복하게 하시며, 7개의 우물로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에게 우물을 빼았겼다가 암양새끼 7마리로 아브라함이 우물 판 증거를 삼고 아비멜렉과 맹세한 것을 기념하여 기념식수 에셀 나무를 심었습니다. 에셀 Eshel..

믿음은 인내다(창15:1-5)

믿음은 인내다(창15:1-5)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지시하신 땅으로 이주 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실망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후사(後-뒤후, 嗣-이을 사)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재확인 하는 내용이다. 특히 본문 2절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라’하셨을 때 온전히 순종한 아브람의 입장에서 10년이 지나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적지 않은 실망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께 이제 나이도 늙고 후사가 없으니 충직한 종 엘리에셀을 후사로 하겠다고 말씀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4절)이라고 말씀..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누가복음6:43-4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6:43-45) 사람이 과연 좋은 열매 곧 선을 낼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고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성령충만하지 않은 사람, 자기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다 바울이 탄식할 때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

기도 삼위일체(3) -일상 기도

기도 삼위일체(3) -일상 기도 기도 모습 삼위일체의 세번째입니다. 앞서서 골방기도와 공동체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세번째로 일상 기도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도 모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세번째 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중요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데 중요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일상 기도는 삶의 매 순간이 기도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기도의 시간이 사라지고 맙니다. 하나님과 좋은 시간 들이 구름처럼 사라지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습니다. 일상 기도가 잘 될 때 신앙의 삶은 풍성해집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실제가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상 기도의 첫 번째 모습은 식사 기도와 잠자리 기도입니다. 기도의 모습 가운데 가장..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기업 얻을 자 (엡 5:1-7)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1-7) 첫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이방인의 모습과 대비될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되엇을 때에 받은 사랑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본 받는 자입니다. 삶의 푯대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배우며 살아가는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 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한 사람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처럼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신 사랑 입니다. 이 사랑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참 무거운 권면이지만,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

위를 보고 부러워하며 살지 맙시다! (2022년 9월 13일 화요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누가복음 9:58). 몇몇 크리스천들이 부부 동반으로 서로의 집을 방문하여 교제했습니다. 그러다가 시험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중 한 부부의 집이 너무 사치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집에 가서 넓은 방과 그 안에 있는 휘황찬란한 인테리어나 가구를 보고는 자신의 집과 비교해보니 마음이 언짢아졌던 모양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호화롭게 꾸며놓고 사는 그리스도인도 문제지만 동료 성도의 그 모습을 보고 시험이 들었다는 부부의 모습도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커다란 집은 고사하고 작은 아파트 한 채도 없이, 아마도 요즘..

열두 제자 (10)(막 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막 3:18) 앞에서 세 명의 제자가 거명됐고, 17절에는 8명이 거명됩니다.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야고보(2), 다대오, 시몬(2)이 그들입니다. 여기서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이고, 빌립은 그들과 같은 동네 출신이며(요 1:44), 야고보(2)는 알패오의 아들이며, 시몬(2)은 시몬 베드로와 동명이인입니다. 그런데 알패오의 아들이 야고보(2)라는 진술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레위가 알패오의 아들이었다는 진술(막 2:14)과 엇갈리는 대목입니다. 알패오의 아들은 야고보인가, 레위인가요? 그 둘은 동일인가요, 다른 사람인가요? 더구나 예수님이 제자로 부른 세리가 레위라는 ..

열두 제자 (9)(막 3:16)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 3:16) 병행구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베드로에 이어서 그의 동생인 안드레를 거명하는데 반해 마가복음은 베드로 뒤로 야고보와 요한을 거명합니다. 예수님은 이들 형제에게 “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는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덧붙이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이들 세 명,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본명 이외의 이름을 받은 셈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들 세 명에게만 특별한 이름을 주셨을까요?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나름으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들 세 명이 눈에 뜨일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 때문에..

에스겔서 23장: 두 자매 이야기

해설: 주님께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사마리아)과 남왕국 유다(예루살렘)을 각각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이름의 자매로 부르시면서 그들의 음행에 대해 책망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 있을 때부터 이집트 남자들과 음행을 즐겼습니다(1-4절). 여기서 음행은 정치적인 결탁과 동맹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주변 나라들과 맺었던 정치적 동맹 관계를 책망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매료되어 하나님을 등지고 그들을 의지 했습니다. 그것은 오홀라가 앗시리아 남성들과 음행을 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홀라를 농락한 후에 버렸습니다(5-10절). 남왕국 유다도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게 홀려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정치적 음행에 있어서 유다는 이스라엘을 능가했습..

축도에서 목사는 왜 손을 들어 올릴까? / 노승수 목사 (가족성장연구소)

목사의 들린 손을 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적 대적으로부터의 승리를 기대한다 우리가 매주일 만나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축도다. 축도에서 항상 목사는 손을 들어서 축도를 행한다. 이 시간 대부분의 성도들은 눈을 감은 채로 기도를 드린다. 기도라면 굳이 손을 들 필요가 있을까? 축도는 성례전적 행위다.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고 보이기 위함이니 당연히 축도 시에는 눈을 뜨고 목사의 들린 손을 바라보는 게 맞다. 물론 이것이 한국교회에는 낯설다는 것을 안다. 같은 이유로 사도신경 역시 기도가 아니라 신앙 고백이며 눈을 뜨고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축도 후 폐회를 알리는 송영의 찬송을 드리는 동안에 그 말씀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좋다. 축도에서 왜 눈을 뜨고 목사의 손을 바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