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0 14

방형과 함께 아침을!(2023.2.10)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얽히고설킨 얘기였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아주 열정적이었기에 지금도 그 속에 휩싸여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나의 일상의 삶이 그러한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여전히 분주한 나날입니다. 그러나 그 분주함이 무엇을 위한 분주함이었지 돌아보니 고개가 숙여지곤 합니다. 많은 것들이 이미 파편이 되어 이미 나의 생각에서 사라지고 그저 시간을 죽인 것에 다름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 많은 시간들을 허비하고, 흩어져있는 상념들에 뭍혀있고, 나라는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지... 그러나 순간순간 살아있음의 신비를 깨닫고 그 신비 가운데 나의 존재를 깨닫고 마음을 곧추세울 수 있기에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렇게 이 아침에 방형과 마음과 생각을 그리고 삶을 나눌..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전도서8:17)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도서8:17)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커서 하늘을 종이로 삼고, 바다를 잉크처럼 사용해서 다 없어질 때까지 기록해도 다 기록할 수 없다(찬송가304장)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크시고, 깊으시고, 넓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을 알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고, 예수님을 보내..

깨달음(2) (막 7: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4) 어제 깨달음의 문제를 한번 짚었는데,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오늘 부연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단지 듣는 데 머물지 말고 깨우침의 단계로 나가야 한다는 말은 어떤 신비한 비술(秘術)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깨우침은 오히려 보편적인 해석학에 속합니다. 해석을 할 줄 안다는 것이 곧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해석할 줄 안다는 것은 말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구요. 그렇습니다. 말, 세계, 해석의 연관에서 참된 깨우침이 일어납니다. 말의 세계가 있다는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말해 줘도 알아듣지 못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말해준 것보다 더 많은 걸..

깨달음(1) (막 7: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4) 예수님은 회중들에게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들으라고만 하지 않고 깨달으라고 하신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마틴 루터는 “fassen”(붙잡으라.)고 했고, 공동번역은 두 명령어를 하나로 묶어서 “새겨들어라.”고 번역했습니다. 전체 문맥에서 이 명령문만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언어의 뉘앙스에서 어떤 영적 의미를 포착해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단순히 듣는 것과 그것을 새겨듣는 것, 또는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듣는 것은 정보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깨닫는 것은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전자는 그 말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신과는 분리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

말씀에 집중하는 훈련(막 7: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4) 고르반을 예로 들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따끔하게 지적하신 예수님은 이제 결론을 내리십니다. 그 내용은 15, 16절인데, 결론에 앞서 이렇게 충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예수님의 이 충고에서도 우리는 바른 신앙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우리의 영적인 태도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새겨듣는다, 또는 집중한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새겨듣고, 집중할 때만 깨달음이 있을 테니까요. 이를 바리새인들의 상황에 빗대서 말한다면, 그들의 종교적 위선은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서 듣지 않고 ..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메타네러티브

서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인 기독교 세계관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인간 지성의 확장으로 이신론적 신관을 가진 시대를 지나게 된다. 이신론(理神論, deism)은 이성적인 신론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시작에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의 끝에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인간의 삶에 동행하며 일일이 개입하는 하나님은 부정하는 신론이다. 이와 같이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격리된 인간은 즉시 무신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1800년대 중후반의 다윈의 진화론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신론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을 촉진하여, 모던(modern)시대를 이끄는 쌍둥이 같은 세속적 인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던시대를 지나면서 너무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실증을 느끼고, 비현실적인 이상..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소서!” (2023.2.10, 금)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데살로니가전서 3:12).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두 번째 기도는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피차간에 사랑하라고 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기를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할 때 가장 먼저 기도할 제목을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 배웁니다. 지체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정성적 기도입니다. 수치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을 실천하면 그 사랑이 살아 움직입니다. 공동체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사랑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 사이의 󰡐정(情)󰡑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감정이 ..

곽재구 '우리가 사랑한 1초들' / '행복은 1초를 아름답게 꾸미는데 있습니다.'

인문학의 주인은 하나님, 인문학을 하나님께! 오늘은 시인 곽재구 님의 산문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을 하나님께 드리며 “행복은 1초를 1초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있습니다.” 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곽재구 시인은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타고르의 모국어인 벵골어를 익혀 그의 시를 직접 번역하고 싶었습니다. 이에 타고르의 고향인 산티니케탄에서 540일을 머물게 됩니다. 그리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자연들에 대한 향기로운 느낌을 한마디로‘내가 사랑한 1초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하루 24시간 86,400초를 다 기억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무 살 때였지요. 내게 다가오는 86,400초의 모든 1초들을 다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1초는 무슨 빛깔의..

목자 없는 양 (마 9:27-38)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 9:27-36) 회당장의 딸을 치유하신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복음을 전하시려고 떠납니다. 그때 두 사람의 시각장애인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이들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묻습니다. 그러자 주여 그러하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고쳐주십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은 지식과 확신과 입술의 고백입니다. 시각 장애인은 예수님이 다윗의 지손인 메시야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능히 고쳐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입술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