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9 14

글쓰기와 설교

글쓰기와 설교 “글쓰기는 내가 쓰는 것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 ‘쓰는 것’은 사용하는 물건과 글을 쓰는 행위를 의미한다. 내가 평소에 무엇을 사용하는 지가 나의 삶을 결정하고 그것이 내가 쓰는 글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한다. (중략) ‘내가 쓰는 것이 곧 내 자신이다.’ 미셸 드 몽테뉴의 명언이다(중략). 글을 쓴다는 건 사는 문제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유영만 저(著) 《책 쓰기는 애쓰기다》 (나무생각, 152-15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글쓰기는 지금 내가 딛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느끼며 생각한 점을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로 옮기는 과정입니다. 삶과 연관이 없는 글쓰기를 한다면 허위(虛僞)로 가득 찰 가능성이 많습니다. “처절한 삶이 없는 건조한 글은 지루하다. 치열한 고민 끝..

방형과 함께 아침을!(2023.2.19)

밤새 시달렸습니다. 깊은 잠을 잘 수 없으니 더 고통스럽기도 했습니다. 오랜 만에 두 딸과 만나 저녁을 같이했는데 낯선 음식들?이 나를 괴롭힌 것 같습니다. 귀한 가족들과 함께한 댓가?를 톡톡히 치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댓가?라면 나에게는 기꺼이 감당해야하는 소중한 것임을 아침에서야 인정하게 됩니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 주일 아침은 바쁜 시간입니다. 그러나 비록 멀기는 하지만 오가는 길이 오히려 좋은 시간이 되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또한 오늘부터 시작되는 작은 모임으로 인하여 더 바쁘지만 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고, 그 모임을 통하여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함께 누리며 나눌 수 있음에 좋습니다. 부디 함께하는 이들의 마음 가운데,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은..

귀신 들린 딸 (막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막 7:25)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한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렸다고 합니다. 이 여자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두었습니다. 어린 딸이 귀신 들렸다니, 이것보다 더 애처로운 일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왜 이리도 애처로운 일들이 많은지요. 소아 암 병동에 가보면 말문이 막힙니다. 장애로 태어난 아이들의 미래는 도대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요. 풍요롭고 화려한 문명이 꽃을 피우고 있는 오늘날 여전히 아동을 성 노리개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푼돈을 받으면서 양탄자를 짜거나 벽돌을 나르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얼마 전에 여자 아이 두 명이 행방불명되었는데, 아직 아..

은폐와 노출(6)(막 7:23)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막 7:23)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아 은폐성을 중심으로 이 세상과 경쟁하는 중입니다. 유대교나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그 사실에 우리의 운명을 걸고 삽니다. 메시아 은폐성으로 인해서 예수의 복음이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받아들여지는 건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예수님이 종말의 심판자라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메시아 은폐성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지난 2천년동안 기독교가 세상을 향해서 선포한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

은폐와 노출(5)(막 7:23)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막 7:23) 유대교 신자들은 우리가 오늘 메시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대교인들과 우리 기독교인들이 구약성서를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는 오직 구약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가 경전으로 결정한 그것을 아무 수정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구약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유대교인들은 똑같이 구약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단순히 예언자로만 인정할 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건 아닙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한복음17:24)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께 "주신 자" 곧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모든 자들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함께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기도를 하실 때로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미래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자도 이미 주셨고, 부활의 영광도, 하나님 나라도, 예수님께 이미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 기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장차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복음과 고난 (마 12:9-21)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마 12:14) 안식일 논쟁은 참으로 집요하였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험을 맞이합니다. 회당에 손 마른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병고쳐주는 것이 합당한지 묻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모욕주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중심을 보시고 비유를 통하여 답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느냐고 답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양보다 귀하다고 하시면서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최종적 답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기쁘고 선한 일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얼마나 씁쓸하고 속상한 일인지 모릅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분 (마 12: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쉼의 자리로 초청하신 주님은 안식일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은 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로부터 고발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근거로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소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고소에 대하여 말씀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변호는 다윗이 배고파서 먹었던 지성소안의 진설병입니다.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다윗과 신하들이 먹었지만 징계받지 않았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율법을 근거로 말씀합니다. 그런 후에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성전보다 크신 이가 바로 자신임을 밝히십니..

존재와 관계로서의 신앙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복잡함을 잘 나타내는 말이 있다면 시장이라는 말입니다. 시장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말소리가 들려오고 잘못하면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현장입니다. 모든 물건이 진열되어 있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사람들이 와서 자기의 입맛에 맞는 물건을 사갑니다. 그러므로 시장의 이미지는 복잡한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현장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생각의 자리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 시대와 같이 동서양의 문화가 섞여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모습은 동양인데 생각은 서양식으로 합니다. 밥상은 동양인데 반찬은 서양식입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