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7 14

길잡이 (마 15:10-14)

(2022/06/26, 성령강림 후 제3주) [예수께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 오도된 영혼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

모두가 전적으로 죄인입니다(로마서 3:9~20)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나 한계상황에 도달하면, 아니 한계상황이 아니라도 예기치 않은 상황이나 감정을 뒤집어 놓는 문제에 부딪히면 숨어 있는 무서운 야만성이 드러납니다. 동물은 본능에 충실 하게 살아갑니다. 본능 이상도 아니요, 본능 이하로 내려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적일 뿐만 아니라 본능 이하로 추락합니다. 흔히 먹기를 탐하는 사람을 ‘돼지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돼지는 일정 부분 이상을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항상 비워놓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능에 충실해도 위를 채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식도까지 채울뿐 만 아니라 먹었던 것을 토해내고 다시 먹습니다. 부패했던 중세나 로마시대를 보면 먹었던 것을 토해내는 쟁반..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야고보서3:11)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야고보서3:10-11) 야고보는 우리의 혀, 우리의 언어 생활에 얼마나 실수가 많은지, 우리의 혀가 정말 통제가 안 되고, 가장 훈련하기 힘들고 중요한 것인지를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혀의 모순을 한편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모순이라고 지적해 줍니다. 우리의 입의 모순을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입이라고 단정하면서 한 구멍으로 단물과 쓴물이 나오는 우물이나, 수도꼭지가 가능하냐, 무화과나무에서 감람 열매를 맺는 것이나,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를 맺는 것이 가능하냐고 따져 묻습니다. 성도들과 대화를 하고, 상담을..

'두 사이에 누가 있는가?'(삼상 20 :1-23)

"3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삼상 20 :1-23) "23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하니라 " 다윗과 사울, 요나단과 사울, 다윗과 요나단 생명과 죽음, 이쪽과 앞쪽. 1. 인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삶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사이에서 살아간다. 생명과 죽음도 한 걸음뿐이다. 2. 두 사이에 누가 있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두 사이에 하나님이 있느냐와 사람이 있느냐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이 있다면 생명..

권력 욕망이 부른 추악함 (삼상 20:24-42)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삼상 20:24-42) 타락한 인간은 욕망의 화신으로 산다. 그 가운데 권력 욕망은 타에 추종을 불허한다. 권력을 가지면 더 가지고 싶고, 끝까지 가지고 싶어한다. 권력 앞에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의미없다. 사울은 사위도 죽이고, 아들도 죽이려고 하였다. 권력이 가진 추악함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있다. 권력의 목적이 상실되면 남는 것은 더러운 찌꺼기다. ..

나를 발견하는 학교

나를 발견하는 학교 “광야는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학교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누구라는 것과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치신다.” 찰스 스윈돌 저(著) 김세권 역(譯)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두란노, 4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아집이 만든 자기만의 세계에 머무르는 일에 익숙했던 리어가 두 딸에게 밀려나서 광야에 던져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합니다. 리어왕은 벼락, 섬뜩한 천둥, 포효하는 비바람 소리가 가득한 광야에서 두 딸의 배신에 몸서리치며 절규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사람이 있는가?” 리어의 질문에 광대는 “리어의 그림자지”라고 대답합니다. 아직도 아집의..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2022년 7월 17일 주일)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에스겔 18:29). "It′s unfair, unfair." 서양의 아이들은 일상생활 중에 불공평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비슷합니다. 선생님이 초등학생에게 어떤 일을 시키면 “왜 내가 해요?”라고 반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말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하나님은 불평하는 백성들을 향해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꾸짖으셨습니다(30절). 결국 백..

권세(2)(막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막 2:10) 본문이 말하는 권세는 헬라어 ‘엨수시아’의 번역입니다. 이것의 가장 일반적인 영역은 ‘authority’, ‘supernatural power’, ‘government’입니다. 일반적으로 ‘권위’로 번역됩니다. 루터는 그 단어를 ‘Vollmacht’(폴마흐트: 권능)라고 번역했더군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언행에 특별한 권위가 깃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권위는 단지 기적을 행한다는 사실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의 인격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권세(1)(막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막 2:10)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의해서 인자로 일컬어진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죄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론의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에 대한 증거는 중풍병자 치유입니다. 그러나 카리스마가 강한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고대인들은 위대한 스승들에게서 이런 기적적인 사건들을 자주 경험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예수님의 사죄 권위를 무조건 담보하는 증거라고 단정하기는 약간 곤란합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실증적인 증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활도 어떤 보편적인 증거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담긴 함의 / 노승수 목사(강남성도교회)

“믿음은 특별계시 통해 계시자이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지식” 칼뱅은 믿음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지식을 포함합니다(기독교강요 3권 2장 2절). 그런데 칼뱅이 이 표현을 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그의 시대에 지식이란 대상과 인식 사이의 일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은 그 기초가 우리 인식에 있습니다. 이전 시대의 자연스런 전제였던 대상 세계가 우리 인식으로부터 도려내어진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지식의 기초를 우리가 지닌 회의적 인식에 놓은 후부터 모더니즘과 후기 모더니즘은 지식으로서 전체 세계를 자기 내적인 체계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후기 모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