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3 12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5년 전에 자식 두 명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을 받은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새로운 희망을 되찾아 성경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 갈테니 창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그날 하루 종일 창밖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나"....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이사야49: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 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이사야49:13)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말 좋은 일, 두고 두고 생각해도 좋은 일, "이것이 정말 행복인가" 싶은 일 그런 일이 있었나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날이 그런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심으로 고난을 벗겨 주시는 날입니다. 모든 구원 받은 자는 구원의 날이 이런 날입니다. 그런데 죄에서 구원받고도 이런 기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기쁨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아직 구원받지 못했거나, 아직도 구도자의 여정에 있거나,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기 때문에 구원받은 기쁨..

화목제의 제물 (레3:1-17)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레3:1) 화목제는 기쁨의 제사요(신27장), 평화의 제사입니다. 화목제의 제물은 제단, 제사장, 바치는 사람이 서로 나눠 가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표시합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기쁨의 자리에 참여합니다. 회목제가 속죄의 기능이 있는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화목제에도도 제물에 안수하는 것이 있기때문입니다(2절). 논의를 염두에 두지만 회목제의 분명한 의미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 기쁨의 제사입니다. 소제는 피뿌림이 없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번제와 화목제는 피의 제사입니다. 화목제물은 수양 뿐만 아니라 암양이나 암염소도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짐승의 내장을 다 하나님께 드립..

중간에서 잘하는 사람이 복의 통로입니다

중간에서 잘하는 사람이 복의 통로입니다 띄어 쓰기의 중요성 서울시 체육회 → 서울 시체 육회 서울시 장애인 복지관 → 서울시장 애인 복지관 무지개 같은 사장님 → 무지 개 같은 사장님 게임하는데 자꾸만 져요. → 게임하는데 자꾸 만져요(중략). 오늘 나온 분 말고 추가 확진자인가요? → 오늘 나온 분말고추가 확진자인가요? Fun 유머연구회 편저(編著) 《사이다 유머》 (브라운 힐, 236-237쪽)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띄어 쓰기를 잘못하면 말의 의미가 삼천포로 가게 됩니다. 중간에서 말 하나를 살짝 바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누가 조각했느냐는 시험문제가 나왔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로댕’이라고 썼습니다. 그 옆에 눈이 좀 나쁜 학생이 흘겨보며, ‘오뎅’이라고 썼습니다. 그 옆에..

역대지하 31장: 십일조를 회복하다

해설: 두 주간의 축제가 끝난 후, 축제에 참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유다의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며 우상을 제거합니다(1절). 아마도 그들을 환대해 준 것에 대한 응답이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성전 제사를 위해 전념하도록 유다 백성에게 십일조를 바치도록 명령합니다(2-4절). 레위인들에게 토지가 분배되지 않은 이유는 다른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려 그들이 성전 제사에 전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이 성전을 폐쇄한 후, 유다 백성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레위인들은 스스로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성전 제사가 지속되게 하려면 십일조를 드리는 전통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명령한 ..

일터에서 주님의 제자로 살기! (2022년 7월 3일 주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마가복음 1:17-20).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았던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첫 제자들의 결단은 그 이후에 주님을 믿고 따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면서 동시에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일터에서 일하는 우리 직업인들의 상황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 제자들처럼 현재의 직업을 다 버려야 할까요? 제자들의 행동은 오늘날 ..

민중 (4) -주체성-(막 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나는 민중 신학자들에게 연대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들에게 민중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여전히 나는 민중 신학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전제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민중은 구원의 객체인가, 주체인가? 물론 이런 질문 자체가 우스꽝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은 이미 당연한 대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민중은 구원의 객체이면서 동시에 주체라고 말입니다. 과연 이런 주장이 옳은 걸까요? 일단 민중이 구원의 객체라는 말..

민중 (3) -정체성-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누구일까요? 한국의 대표적 신학이라 할 민중신학의 역사가 최소한 40년은 흘렀지만 민중에 대한 개념 정리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나름으로 개념규정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은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말한다면 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민중이겠지요. 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가 그들이겠지요. 이스라엘의 주류 역사로부터 벗어난 노예, 나그네, 소작농, 장애인, 소수인종, 난치병환자, 여자, 어린아이들, 낮은 계급의 군인 등..

PMS의 미래를 생각한다 / 허드슨 선교사(전 PMS 총무)

PMS의 전신은 총회 선교부이다. 2004년도에 “총회 선교부”는 “총회(합신)세계선교회”라 명칭을 변경하고, 영문 표기는 “PMS(Pioneering Mission Society)”라고 쓰게 되었다. 그로부터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PMS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12년 전 “선교회(PMS)”로 독립함에 따라, 매년 9월 교단 총회에서 선교부장과 부원을 위촉받던 “총회 상비부” 체제에서 벗어나, 매년 10월 “선교회(PMS)” 자체의 이사회 총회에서 PMS 임원을 선출한 후 다음해 교단 총회에서 인준을 받게 되었다. 그만큼 PMS 운영의 자율성과 전문성, 책임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이는 선교행정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매우 바람직한 변화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2개 ..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 글쓴이 /봉민근 그릇이라고 다 같은 그릇이 아니다. 생김새에 따라 그 용도가 다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다. 생김새가 다르고 달란트도 각자에 맞게 주셨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능력과 사명도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재주를 이용하여 세상을 살아간다.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만드실 때에 부여하신 목적대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와 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목적을 잃은 사람은 삶의 이유를 모른다. 오직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지만 목적이 있는 사람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사명이 있다, 거기서 인생의 단맛을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