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1 14

강단의 위기 / 정용섭 목사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언급한 말인데,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현재의 생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토대에 둔다.그 미완의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을 가리켜주의 재림, 종말, 심판이라고 한다.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여기에 집중된다.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종말론적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말이 실질적으로 들리느냐에 있다.지난 주일 예배 후 환담 중에어떤 신자로부터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예수의 재림 때 일어날 생명의 완성을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긴 하지만그 생명의 완성이 구체적으로 손에 들어오지 않아서기다린다는 그 영성에 동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설교자가 청중들의 영적 상태를좀더 세심하게 이해해야 하며,설교 내용이 좀더 실질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도대체 생명의 완성이란 ..

한국교회 문제의 책임 / 정용섭 목사

일전에 어떤 분과 이야기 하는 중에서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새롭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목회자인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그분이 아주 사실적으로 말했다고 보면 된다.   내가 물었다.생각도 깊이도 신앙도 진지한 분들이왜 수준 이하의 교회에 붙어 있는 거죠?본인들도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말입니다.그런 방식의 신앙생활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결국 자신의 영혼이 훼손되는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내가 일반 신자였다고 한다면벌써 다른 교회로 옮겼을 겁니다. 그분의 대답은 이렇다.신자들이 그런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은아주 단순한데 있다.주일을 지켰다는 안도감이 그것이다.마음이 불편하지만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하나로만족해 하는 것이다.신앙이란 마음에 들지 않아도억지로라도 교회..

잠자는 식물 / 정용섭 목사

잠자는 식물 요즘 원당의 밤은 어둡다.가로등의 숫자가 삼분의 일,또는 사분의 일로 확 줄었다.에너지 절약을 솔선수범하는 줄 알았는데,그게 아니었다.고추 등 식물의 수면을방해하지 않으려는 조치라고 한다.식물들도 밤에는 자야한다.잠을 못자면 수확이 떨어진다는 것이다.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싶겠지만농부들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니믿어도 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디선가 옛날에그런 말을 듣거나 글을 읽은 것 같긴 하다.하기야 좋은 음악도식물의 성장에 양향을 끼친다고 하지 않나.지금 우리는 그런 생명 원리와 반대로 살고 있다.밤과 낮의 구분도 없다.도시마다 밤이 너무 밝다.쉼이 없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한 뭉텅이로 굴러간다.그런 삶을 문명이라고 한다.돈만 되면 공장도 24시간을 돌린다.노동자들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설교 맛보기 / 정용섭 목사

설교 맛보기 내일 설교 본문은 골 3:1-11절이다.제목은 4절을 그대로 따왔다.‘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이게 과연 말이 될까?현대인들이 골로새서의 이런 진술에진실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일까?이런 표현이 자칫하면일종의 열광주의로 이해된다.신앙적 열기로만 말하면열광주의를 따라올 세력은 없다.그래서 그런 이들이교회의 주축세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당한 부류가이런 이들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그런 입장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시한부 종말론에 떨어진다.예수가 재림할 때자신들도 공중으로 휴거한다는 믿음을아주 뜨겁게 유지하는 이들이 열광주의자다.구름 타고 올라간다는 표현을종교적 비유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실질적인 것으로 생각한다.아마 겉으로는 그렇게 믿는다고 말하면서도속으로는 전혀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

구어와 문어 / 정용섭 목사

구어와 문어 요즘 를 쭉 읽고 있다.인쇄소에 넘겨주기 전에 문장을 다듬기 위해서다.근데 그게 보통 문제가 아니다.‘기꼬’는 원래 인터넷 라이브 강의를녹취했다가 그대로 풀어 쓴 탓에전체적으로 구어체로 되어 있다.문장에 짜임새가 없다.주부와 술부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거나똑같은 말이 반복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특히 문장 끝이 ‘... 인데요.’라거나‘... 에요.’, 또는 ‘... 같은데...’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말도 문장처럼 완벽하게 구사하기도 한다.그런 건 타고난 사람의 능력이다.나에게는 그게 턱없이 부족해서구어체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그 사실을 이번에 기꼬를 다시 읽으면서 확인했다.문장을 다 손볼 수 없다.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한정이 없다. 어떤 분의 이야기는구어체의 특색이 살아 있는 게오히..

이가 누구이기에 (눅 7:36-50) / 신동식 목사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 앉았을 때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 뒤로 와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십니다. 그 머리결로 닦고 향유를 붓습니다.그러자 초대한 바리새인이 속으로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만약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텐데 막지 않은 것에 대한 의심입니다.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마음을 아시고 한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데나리온을 빛진자에 대한 탕감이야기 입니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사랑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시몬은 자연스럽게 오백 데나리온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예수님은 이를 통하여 시몬과 여인을 비교합니다. 시몬은 집에 초대는 하였지만 아무 것도 하..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운다!(삼하20:14-26)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운다!(삼하20:14-26)   본문은 한 지혜로운 여인에 의해 세바의 난이 진압되는 장면이다.   사실 요압의 군대는 애초에 아벨 성을 포위하고 그 성을 아예 허물어 버림으로써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제그 성이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과의 면담을 통해 요압 작전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세바만 죽이고 아벨 성은 무사한 채 반란이 진압된 것이다. 이는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한분의 의로운 행동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셨음을 예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롬5:15-21).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28:26) / 이금환 목사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언28:26) 많은 사람이 결코 믿음직 하지 않은 "자기 마음"을 믿으며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를 미련하다고 합니다. 죄인의 마음인 자기의 마음, 욕심이 가득한 자기의 마음, 자기의 생각대로 통제되지 않는 자기의 마음, 바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도 바른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는 자기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석같이 자기의 마음을 믿으며, 그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보다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하시고, 미련한 마음을 지혜 가운데로 이끌어주시고, 사람의 마음의 중심에 계실 수도 있는 말씀이라고도 하고, 빛이라고..

욕심의 끝은 어디인가? / 봉민근

욕심의 끝은 어디인가?                 글쓴이/ 봉민근           한없이 정직하여라.한없이 순진하게 살아라.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나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이다.숨길 것을 숨겨야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자신만 초라해진다.욕심이 죄를 만들고 불행을 만드는 씨앗이다.욕심은 자신의 숨통을 쥐어 트는 악마의 발톱이다.가져도 족함이 없는 사람에게 행복은 영원히 없다.좀 더 단순하게 살면 인생은 힘들지 않다.욕심의 끝은 어디인가?아픔이요 고통이요 슬픔이 그곳에 있다.욕심은 전쟁과 시기와 분쟁의 씨앗이다.원수가 욕심에서 나온다.욕심은 인생에 검은 구름이다.모든 죄는 욕심에서 비롯된다.어차피 욕심부려 봤자 영원한 내것은 없다.많은 이를 향하여 뿌려주고 흘려보..

복이 화가 되지 않도록 (막 10:17-22) / 김영봉 목사

해설: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려 하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17절). “달려왔다”는 표현에서 그의 절박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무릎을 꿇었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그는 예수님께, “선하신 선생님”(17절)이라고 부른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18절)고 답하신다. 그 사람이 생각한 선함과 예수님이 생각한 선함이 달랐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선하다” 할 만한 사람은 많다. 그 사람은 그 정도의 수준에서 예수님을  선하다고 불렀다. 예수님은 온전한 의미에서 선함을 생각하셨다. 절대적 의미에서 선하신 분은 하나님 뿐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한껏 높인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 그분이 누구이신지 제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