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48장 높은데 거하며 땅의 것들을보는자

새벽지기1 2021. 9. 21. 06:18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사람이 하나님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모른다면 거기에도 죄가 있는 것이다. 때로 이 점이 슬프게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거나 함께 기도할 때 분명하게 나타나고, "주님을"(thee)과 “주님이"(thou) 라는 말 대신에 "당신"(you)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서 바로 나타난다. 이 사실에 너무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도 여전히 인사말에 두 가지 형태, 곧 좀 더 일반적인 형태와 좀 더 관습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좀 더 친밀한 형태를 사용하는 것이 언제나 변하지 않는 습관이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예전에, 네덜란드 아이는 아버지에게 당신(you), 당신 의(your) 라는 말을 썼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를(thee)과 아버지가(thou) 아닌 다른 말을 사용하면 제 5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육신의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때에도 언어를 잘 판단하면 품위 없는 말투를 피하게 되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지나치게 친숙한 말로 부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공경심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친숙한 말투를 쓰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게 대화하고 있음을 은근히 보여준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이 없이 그런 말투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그점은 인정해야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는데 있어서, 전자의 좀 더 친숙한 말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손실이다.

 

고귀한 것과 평범한 것은 다같이 자연스럽게 공통된 어떤 특징을 갖는다. 보좌에 앉은 왕은 신분이 높고, 그의 시종은 평범하다 그럴지라도 이 둘에게 공통점이 있다. 즉 왕이나 시종이나 그들의 성은 좀처럼 사용되지 않고, 대체로 세례명으로 이름이 불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잉글랜드 왕 조지라고 부른다. 그의 성이 윈저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시종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세례명으로 안다. 그러나 세금을 내는 경우에는 세금 내는 본인의 이름으로 종종 성이 사용된다.

 

여기에는 숨은 이유가 있다. 고귀한 것은 우리 삶의 일반적인 한계에서 벗어나고, 고귀한 것 밑으로 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사야서에서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냐니"(57:15) 라는 말씀을 읽을 때, 여기에서 높은 자와 낮은 자가 함께 언급된다.

 

우리 일반 생활에는 어떤 한계와 형태, 어떤 범위가 있고, 잘 알려진 모습과 외관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합해서 우리 인간 생활을 형성한다. 그리고 전능하선 하나님을 인간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이교적인 것은 모두 죄이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이냐 동물의 모양으로 형상을 만들고, 이것을 예배하는데, 이렇게 되면 인간 생활과 신적 생활의 깊은 차이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이와 달리, 성령께서는 “존귀한 자”의 거룩한 영역, 곧 우리의 세상적인 생활보다 훨씬 높은 데로 나가는 생활의 영역을 드러낸다. 이미 자연은 우리 위에 펼쳐진 궁창에서, 급히 위로 솟아 오르는 수증기에서, 그리고 뻑백한 검은 구름들 사이로 우렁우렁하는 강력한 천둥소리 속에서 그 고유한 모습을 보여 준다. 천둥을 동반한 심한 폭풍우나, 바다에 사납게 날뛰는 태풍, 땅이 발 밑에서 진동하게 만드는 지진, 용암을 뿜어내는 화산을 대할 때 모든 사람은 우리 인간생활의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을 느낀다. 이런 것들은 우리보다 높고 강력한 세계의 존재를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존귀하다”고 부르는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가 영혼과 마음을 높여 천사들과, 영원한 빛 가운데 거하는 복된 존재들의 세계를 생각할 때 "존귀함"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른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 곧 위엄이 있으신 우리 하나님은 훨씬 더 높은 곳에 계신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궁전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 예언으로 말씀하신 묘사는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 함에서 도무지 능가할 수 없는 분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우리가 계속해서 사람으로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시도록 하고, 창조주께서 피조물 위에 높이 계시는 거리를 결코 잊지 않으려면고 같이 해야한다. 이 거리를 인정할 때, 예배에서 공경심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높은 보좌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그러나 높고 존귀하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이 하나님께서는 또한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사람과 함께 거하신다. 높은 곳에 거하시는 이 하나님께서 또한 스스로 낮추시어 하늘과 땅에 있는것들을 살피신다(시 113:6). 사람들 가운데서는, 가난한 자들과 종들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서 보다 오히려 그 지위가 확실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존중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한 신하가 왕에게 가까이 갔을 때 왕이 아주 친절하게 말을 걸면 대체로 신하는 놀라기 마련이다.

 

주 하나님은 높고 존귀하신 분이며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신 분이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피조물을 돌아보실 때 하나님의 거룩한 친밀함으로 사람을 새롭게 하고 위로하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일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 각 사람은 예외적인 신성한 존재가 된다.
 

영원한 분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야 하는 것이지, 피조물이 감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편에서 감히 공경의 경계선을 없애버리려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내쫓으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높으심을 희생해가면서 자신을 높이면,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모든 것이 방해를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무한하신 분, 더 고귀하신 분 뒤에서 내용 없는 이름, 곧 의미 없는 소리를 외치는 것뿐이고, 그렇게 하면 결국 그는 하나님과 아버지롤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엄숙한 제한 아래 두신다. 우리는 은혜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경심을 마음에 품도록 하기 위해 곧 바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대로, “우리가 천상의 위엄을 땅의 것으로 생각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고, 높이 거하시는 거룩하고 존귀 하신 분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어 땅의 것들을 살피시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데에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는 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이중의 노력이 일어나는것이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자의 일이 먼저 시작되고,후자의 일이 그 뒤를 따른다. 타락 후 낙원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려오셨다.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로 몸을 구부리는 것은 모든 계시를 통해서 계속된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하나님께서 이같이 전 인류를 위하여 내려오심이 절정에 이른다. 예루살렘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내려오셨다. 지금도 하나님의 이 내려 오심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모든 영혼에게 계속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높은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또한 통회하는 마음안에 거하신다. 그 다음에, 이와 나란히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는 일이 진행된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을 들어 올리나이다"(시 25:1, 개역개정은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역자주) 이때 우리가 구하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의 전에 거함으로 높은 망대이신 하나님께 피하고, 거룩하신 자와 함께 거하기 위해 이 세상 바깥에 사는 것이다.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느니라"(골 3:1). 그리고 “너로 위에 있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슥 3:7, 개역개정은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역자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려오실 때는, 다곤 신상과 같은 여러분 자신의 우상을 내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곧 여러분이 마음으로 통회할 때,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한 높은 위치에서 자신을 좀 더 겸손하게 보는 평가로 내려왔을 때, 가로막는 담이 무너지고, 거리가 줄어들며,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 속에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끼며, 여러분이 하나님께 가까이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그 결과 하나님께 지극히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갖는 공경심이 아주 생생하고 뚜렷하게 나타난다. 반면에,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주 우리 하나님 앞에서 갖는 모든 건전한 두려움, 모든 경외심이 점점 더 사라져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일상적인 대화에서 아무 의미 없는 히사로 사용함으로써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분별없고 생각 없이 욕되게 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높고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익한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내밀한 일을 알게 하시고, 피조물이 자기의 은밀한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시며, 하나님의 장막에 들어오도록 하시고, 피조물의 마음을 찾아가시고, 이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고 경배의 찬양을 드리는 자들만이 놀라운 특권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시는 것은 은혜로, 순전히 은혜로 되는 일이다. 

 

이 약속은 높고 존귀하신 분의 처소, 곧 아버지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 이 세상의 상태에서 하늘의 상태로 넘어 가려고 하는 자들만의 것이다. 

 

출처 /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