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49장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는그릇 행하였더니

새벽지기1 2021. 9. 22. 07:28

인생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밀물과 썰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매우 개인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또한 있다. 그러나 이것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실망과 슬픔이 대체로 영혼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고통은 언제나 사람을 온전케 한다는 이 사상은 경험적인 측면에서 아주 크게 반박된다. 뜻밖에 심각하게 닥치는 큰 재난이나, 역병의 발생, 배를 파선시킬 듯한 폭풍우, 파괴적인 지진, 또한 개인적인 병으로 인한 예기치 않은 죽음의 위협은 생각 없이 지내던 세상과 그 세상에 살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상관해야 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한동안 마음을 쓰게 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위험이 지나고 나면, 받았던 약한 인상이 사라지는데 불과 며칠 걸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역병으로부터 구출을 받고나면, 뻔뻔스러운 세속적인 태도가 전보다 더 경건치 않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일은 다시 다 잘 되었다. 그들은 마음으로 두려워했던 것을 한동안 거의 부끄러워하다시피 하였다. 이제는 다시 자기들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었고, 전과 같은 불운이 다시 오기 전에 인생을 즐길 기회를 늘리려고 할 것이다. 혹은 사람들이 이번처럼 심하게 요동하지 않고 손실을 조심스럽게 피한 곳에서는 재난 후에 이전의 충족하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졌고, 하나님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삶이 하나님 없이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삶이 이런 재난으로 멈추지 않은 것은 종종 있었던 일이다. 인생의 큰 역경으로 인해 전에는 일반적인 믿음이라도 가졌던 영혼이 적극적인 무신론에 빠지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지금까지 그 사람은 곤경의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고, 그러면 고난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이 확실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 남편이나 자녀의 병상에서 “하나님이여 이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기도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무정한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끌고 무덤으로 들어가 버렸을 때, 온 영혼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난다. “고난에 처해서 내가 기도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혹 하나님이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사랑의 하나님일 리가 없다." 그래서 실망한 영혼은 하나님을 저주하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삶을 산다.

 

고난이 사람을 온전케 하고 매우 진실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그 마음에 미리 은혜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 뿐이다. 따라서 세상의 거듭나지 않은 자녀에게는 그런 일이 없다. 사실 고난은 또한 방황하는 사람을 멈춰 세우고 변화시키는 일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수단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때 조차도, 그 영혼 속에 일어나는 변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이 일과 관련해서 고난은 단지 보조적인수단 일 뿐이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 있을 때 아내가 서슴지 않고 그에게 이같이 말했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고난에서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시편 기자처럼 하늘의 은혜를 받은 영혼 뿐이다.  

 

기쁨과 번영 가운데 있을 때 문제가 더 심각하다. 일반적으로 볼 때, 매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고해야 하는 사람들보다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 계층들이 하나님에게서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이에서 보는 뚜렷한 대비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서 널리 볼 수 있었다. 빛나는 아름다움, 넘치는 건강, 직업이나 사업에서 중단 없는 번영, 가정의 큰 행복, 풍부한 물질적인 부요, 그래서 근심과 걱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가 참된 경건을 기를 수 있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이 모든 조건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자충족감에 빠지고 자신을 높게 평가하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보다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것이 개인들에게 일어난 현실이고, 많은 세대를 통해서 가족들에게 해당된 사실이며, 모든 민족들에게 적용된 사설이었다. 백성들에게 평화가 장구하면 국가의 힘이 강력해지면 나라에 부가 차고넘치면, 거의 언제나 같은 속도로 나라는 영적으로 후퇴하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영적 자유를 위해 오랜 동안 힘들게 싸워야 했을 때, 종교와 공중도덕은 높은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사방에서 금이 흘러 들어오고 부가 삶의 법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방종과 감각적인 쾌락을 탐닉하는데 얼마나 깊이 빠졌는지 모른다. 절제와 극기로 말미암아 강대해졌고 사치와 쾌락의 탐닉이 시작되기 전까지 강국을 유지하다가 안으로부터 국가의 타락과 밖에서 야만족의 침입으로 종말을 맞이한 세상의 강력한 로마 제국에 일찍이 있었던 것처럼, 그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물질적 복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로 인해 하나님께 더욱 깊은 애정으로 연합된 개인들과 가족들, 세대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은혜가 선행되었고, 인생에서 이런 번영에 은혜가 따랐기 때문이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자녀들일지라도 어떻게 번영이 영적 쇠퇴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적 표본으로 지금도 존재한다. 사탄이 번영을, 그 번영을 주시는 분에게 대항하는 무기로 바꾸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는 예는 드물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기쁨에서나 슬픔에서나 다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 깊이 경험하되, 기쁨에서는 소극적으로 슬픔에서는 적극적으로 그 지식을 경험하는 매우 유익한 수단을 제공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의 길을 조사해 보면서, 기쁨과 풍요의 날들을 지나는 동안 기도가 많이 기계적이 되고, 교만한 마음이 생기며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더 신뢰하고,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는 위험을 알아챌 때, 진설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위험으로 인해 마음과 지성의 경향을 바꿀 것이다. 고러면 그의 마음이 때때로 세상의 좋은 것들에 강하게 쏠렸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과 이 세상 재물이 함께 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대적한다는 것을 이제는 더 분명히 알게 된다. 그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안다. 왜냐하면 낙원에 부요가 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집에는 부요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있는 죄 때문에 재물이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힘으로 변하는 것이다.

 

출처 / 자기부인 / 바퀴